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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관련/연구_생각

사라져간 이들을 기리며

by adnoctum 2011. 1. 7.

   사람은 다른 생명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을 수밖에 없는 heterotroph 이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굳이 육식을 다른 이들만큼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차피 개든 새든 식물이든 다른 '생명체'로부터 에너지를 얻을 수밖에 없는 것이 heterotroph의 근본적 한계이며, 비록 그, 뭐랄까, 발현의 정도?, 그것이 차이가 날 뿐 작은 곰팡이부터 산호, 이끼, 배추, 시금치, 당근도 개나 고양이, 새, 소처럼 '생명'이 있는 것이다.

   전공이 전공이니만큼 '생명'에 대해서 꽤 오랜동안 생각을 해 왔었고, 실제로 우리의 과학적 호기심을 위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생명을 희생시켜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내가 생각해야 했던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이 글 말미에 있는 바쇼와 같은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 있는 체계 자체가 서양과학이기에 테니슨의 그것에 지금은 더 근접해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 '생명'을 무조건 어떠한 '도구'로 보지는 않는다. 가끔은 차라리 효모(이스트)를 갖고 연구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곤 하니까.

   왜 이리 서론이 긴가 하면, 오늘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다행히 이제 죽은 사람도 나오고, 아, 물론 그 분들께는 안 된 일이지만,"
이란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심장병 위험 인자에 관한 데이터를 갖고 얘기하는 중이었는데, 병원에 등록된 사람 중 사망자가 나오기 때문에 이제 무엇이 사망(생존기간)에 영향을 주는 것인지 찾아 볼 수 있다는 의미로 한 얘기였다. 사망자가 매우 적다면 통계적 유의성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 사망이 있기까지의 기간에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없는데, 그래도 이제 죽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찾는 시도를 해 볼 수 있다는 것. 어떤 이는 어떻게 저런 말을 하느냐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충분히 이해도 공감도 간다. 누군가가 빨리 죽어서 데이터좀 만들어 보자, 라는 심산이 당연히 아니기 때문이고, 사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그래도 좀 더 나은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른 분야도 물론 나름대로의 그러한 것이 있겠지만 생물학 분야는 특히 사람들을 아프지 않게 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으니 저런 말을 충분히 이해할만함이다.

   나는 동물 실험은 하고 싶지 않은데, 쥐를 잡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뭐, 집에서야 때려 잡겠지만, 으..., 왠지 약간의 죄책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실험하면서 잡으면. 그런데, 그런 일을 누군가가 해야 하기에 누군가는 하고 있다. 나는, 인간인 우리가 우리 종을 위하여 쥐나 돼지, 원숭이같은 것을 가지고 연구를 하는 것은 마치 우리가 소를 잡아 먹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간주한다. 외려 돌연변이 물고기나 강아지를 만드는 일이 더 잔인한 것이지, 순전히 '유희'적 이유 때문에 그럴 뿐이니까. 물론 생각 또는 철이 없는 사람들은 쥐나 그러한 것을 완전히 '도구'로만 보는 경우도 있겠지만, 글쎄, 과연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무리 건조하고 메마른 이공계생 사람들이라 해도 멀쩡히 살아 있는 쥐를 수마리 죽여야 할 때는 기분이 안 좋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친구녀석 중에 한 명은 쥐를 잡는 날이 오면 담배를 수십개 피운다고 하기도 했었고.

   학부 때, 내가 있는 단과대에서 전철을 타러 내려 오는 도중에, 어느 비 앞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꽃다발을 놓고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자주 지나치는 곳이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무엇인지 몰랐는데, 가보니 의대에 시신을 기증한 사람들을 기리는 비였다. 그리고, 그 중 누군가의 자손 혹은 지인이 꽃을 놓아 두고 갔던 것이다. 그것을 안 이후 왠지 그 옆을 지날 때면 약간의 찡함 이라 해야 하나, 그런 것이 느껴지곤 했다.


   다소 과장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그렇게 사라져 갔던 많은 사람, 쥐, 돼지, 물고기, 개구리, 예쁜꼬마선충, 그리고 내가 알 수 없는 많은 생명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리.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


   삶에 있어서의 소유양식과 존재양식간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서론으로서 고(故) 스즈키 다이세스가 《선(禪)에 관한 강의》에서 언급한 비슷한 내용을 지닌 두 편의 시를 실례로 들겠다. 하나는 일본 시인 바쇼(1644~1694)의 하이쿠이며, 또 하나는 19세기의 영국 시인 테니슨의 시이다. 두 시인은 비슷한 경험, 즉 산책중에 본 꽃에 대한 자기의 반응을 기술하고 있다. 테니슨의 시는 다음과 같다.


갈라진 암벽에 피는 꽃이여
나는 그대를 갈라진 틈에서 따낸다.
나는 그대를 이처럼 뿌리째 내 손에 들고 있다.
작은 꽃이여---그대가 무엇인지,
뿌리뿐만 아니라 그대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때 나는 신이 무엇이며
인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바쇼의 하이쿠를 옮기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자세히 살펴보니
냉이꽃이 피어 있네
울타리 밑에 !

   이 두 시의 차이는 현저하다. 테니슨은 꽃에 대한 반응으로 그것을 '소유'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꽃을 '뿌리째 뽑아낸다.' 그리고 그는 신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 꽃이 할 수 있는 기능에 대한 지적 명상으로 시를 끝맺고 있지만 꽃 자체는 꽃에 대한 관심의 결과로서 생명을 빼앗긴다. 우리가 이 시에서 보는 테니슨은 살아 있는 것을 해체하여 진리를 찾으려는 서구의 과학자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쇼의 꽃에 대한 반응은 전혀 다르다. 그는 꽃을 따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꽃에다 손을 대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그것을 '자세히 살펴볼' 뿐이다. 스즈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마도 바쇼는 시골길을 걷다가 울타리 밑에서 사람의 눈에 별로 띄지 않는 무엇을 보게 된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평소에는 통행인에게 무시되는 보잘것없는 야생초임을 알았다. 이것이 이 하이쿠에 기술되어 이는 그대로의 사실이며 특별히 이렇다 할 시적인 감정은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일본으로 'かな(카나)'라 하는 마지막 두 음절만은 예외인 것 같다. 이 조사는 종종 명사·형용사·부사에 붙어 쓰이는데 감탄·찬양·슬픔·기쁨 등의 감정을 의미하고, 때로 영어로 옮길 때에는 감탄부호로 쓰면 아주 잘 어울린다. 이 하이쿠에서는 전체가 이 부호로 끝나고 있는 것이다.


   테니슨은 아무래도 사람과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꽃을 소유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가 꽃을 '소유'함으로써 꽃은 파괴되고 만다. 바쇼가 바라는 것은 '보는 것'이다. 그것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하나가 된다. 꽃을 그대로 살려두면서 자신을 꽃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테니슨과 바쇼의 차이는 괴테의 다음 시로 충분히 설명된다.


찾아낸 꽃

나는 홀로
숲속을 헤맸다.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정처없이

나무 그늘에서 찾아낸
한 송이 꽃
별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운 눈동자 같은

꺾으려는 손을 보고
꽃은 상냥하게 말했다.
어째서 나를 꺾으려 하세요
곧 시들어버릴 텐데.

나는 그것을 뿌리째 파내어
아름다운 정원에다 심으려고
집으로 그것을 가져왔다.

그리고 조용한 곳에
꽃을 다시 심었다.
이제 그것은 많이 자라
꽃이 피게 되었다.


   괴테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걷다가 아름다운 작은 꽃에 이끌린다. 그는 그것을 꺾으려는, 테니슨과 같은 충동을 가졌던 것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테니슨과는 달리 괴테는 그것이 꽃을 죽이는 것임을 깨닫는다. 괴테에게 있어서 꽃은 당당히 살이 있는 존재이므로 꽃이 그에게 말을 하며 경고한다. 그리고 그는 테니슨과 바쇼와는 다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는 그 꽃을 '뿌리째' 파내어 다시 심기 때문에 그 생명은 파괴되지 않는다.

   괴테는 말하자면 테니슨과 바쇼 사이에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결정적 순간에 생명의 힘이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힘보다도 강한 것이다. 이 아름다운 시에서 괴테가 그의 자연탐구 개념의 핵심을 표명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테니슨의 꽃에 대환 관계는 소유- 물질의 소유가 아니고 지식의 소유- 양식에 속한다. 바쇼 및 괴테의 꽃에 대한 관계는 존재양식에 속한다.

   '존재'라는 말로 나는 어떤 것을 '소유'하지도 않고 또 '소유하려고 갈망하지도' 않으면서 즐거워하고 자기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여 세계와 '하나가 되는' 삶의 양식을 표현하고 있다.

   생명을 몹시 사랑했던 괴테는 인간의 해체와 기계화에 대항하여 투쟁한 탁월한 투사 중의 한 사람이며, 여러 시에서 대립되는 '존재'를 표현하고 있다. 그의 <파우스트>는 존재와 소유 (후자는 메피스토펠레스가 대표하고 있다)간의 갈등을 극적으로 기술한 것인데, 다음의 짧은 시에서 그는 존재의 특징을 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재산

나는 알고 있노라, 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음을
다만 내 영혼으로부터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사상만이 있음을.
그리고 사랑에 가득 찬 운명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를 기쁘게 하는
모든 행복한 순간만이 있음을.

   존재와 소유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아니다. 그 차이는 오히려 사람을 중심으로 한 사회와 사물을 중심으로 한 사회 사이에 있다. 소유지향은 서양의 산업사회의 특징이며 거기서는 돈, 명예, 권력에 대한 탐욕이 인생의 지배적 주제가 되어버렸다. 그다지 소외되지 않은 사회 - 예를 들면 중세사회, 주니 인디언, 아프리카의 부족사회와 같이 현대의 '진보' 사상에 영향받지 않는 사회-들은 각기 바쇼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산업화가 2,3세대 진행되면 일본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테니슨을 갖게 될 것이다.

    서구인들이(융이 생각한 것처럼) 선과 같은 동양적 체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인간'이 재산과 탐욕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 않은 사회의 정신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가르침(바쇼와 선처럼 이해하기 어렵다)과 불타의 가르침은 같은 언어의 두 가지 방언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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