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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_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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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하나의 커다란 실험이다 "삶도 하나의 커다란 실험이다." 사명감이나 어떤 의미는 잘 모르겠고, 허무의 끝에서 자유로워지며 어렴풋하게나마 들었던 느낌을 나중에서야 회상해 보자면 그렇다. 내 삶 자체도 하나의 실험으로 간주하기. 이루어야 할 것이라던가, 특정 시기에 완수해야 할 일은 없다. 궁금한 것을 해보기. 시간의 길이가 문제다. 길을 가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을 지나칠때면 궁금하니 가본다 치면 한 10초에서 몇 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무엇인가가 궁금해 하는 연구는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년을 하게 된다. 그런데, 삶 자체도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렇게 살면 결국 어떻게 될까?'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일이고, 많은 것들은 아직 시작도 안 되었으며, 몇 가지는 중간 정도에 와 있고..
철학에 관한 관심 철학은 예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는 주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요즘은 어떤 식으로 접근할까, 고민 중이다. 어떤 분야를 익혀 나갈 때, 초반에는 우선 나와 있는 개념들을 무차별적으로 흡수를 한 후, 자기만의 문제 의식으로 그것들을 재정비할 수도 있고, 처음부터 문제 의식을 갖고 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내 경우는 후자에 좀 더 맞는다. 크게 범주화해보자면 인지과학과 과학철학인데, 정확히 이들에 맞지는 않을 수 있다. 이 중 인지과학에 더 가까울 수 있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일반인들이 과학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식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과학자가 보다 참신한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식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과학의 발전을 꿰뚫고 있는 생각의 방식? 그러한 것은 무엇인..
개 한마리와 떠돌다 객사를 한다 해도 자유로움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하겠다,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자유란 내게 언제나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보수와 진보 중 한 쪽을 택할 때 나는 진보에 가까운 듯이 보일 수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미 나뉘어져 있는 그러한 기준이나, 그러한 기준에 의해 구분된 성향의 모범적 성향/모습 따위는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보수고 진보고 그러한 것은 내게 별 의미는 없다. 단지 내가 의아한 것은, 소위 보수라 일컬어지는 집단의 주장 중에는 모순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다. 물론 그 모순은 별개로 친다 해도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보수적 성향'이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경우 역시 거의 없긴 하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주장에 정당성을 실어 주기 위하여 그때그때 자신들에게 편리한 주장을 아무렇게나 취..
많아진 생각, 적어진 글 한 단계를 지나면, 이제 끝났다, 하는 안도와 함께 또다른 시작을 맞딱뜨려야 함을 알게 되곤 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는 비교적 자연스럽게 대학원에 진학했다. 석사/박사 과정은 꽤 오래 걸렸기 때문에 이 때의 관건은 졸업이었다. 졸업을 했을 때,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끝냈다'는 안도감이 크게 들었다. 그 후로 2년이 지나는 지금, 물론 중간의 반년은 파견을 가 있긴 했지만, 과도기적 시기에 있음을 느끼고 있음과 동시에, 이제 또다른 시작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한 현실적 압박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조차도 너무나도 '나'적인 고민의 종류가 발생해버리고 말기에 생각이 많아 지고 있다. 평범하게 회사에 가거나, 연구소에 가거나, 교수가 되거나. 물론, 평범하기조차도 너무나 힘든 요..
비관주의자인가, 정말? 지난 글(비관주이자였던 것이다)에서 나는 스스로가 비관주의자임을 알게 되었다고 했었다. 그 이후 며칠이 지나는 동안 몇 가지 일을 겪으면서 나는 어쩌면 내가 그 때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비관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학습된 낙관주의라는 책의 저자가 생각하는 '비관주의'와 내가 생각하는 비관주의가 다르다. 또한, 어떤 한 사람이 비관주의자다 아니다를 판단하는 여러 기준이 있을 수 있다. 학습된 낙관주의의 저자가 사용한 기준들 중 몇 가지는 받아들일 수 있고, 그로 인해 그러한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내가 비관주의자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꼭 그 기준만으로 비관주의자임을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얼마 전 고속도로를 달리다 자동차가 고장이 났다. 그래서 마침 근처에 있는 휴게소에 들러..
행동의 기억 특정 행위를 지속적으로 하게 되는 원인 중의 하나는 그 행동과 연관된 반복된 상황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금연 5일차로 접어 들면서 지속적으로 맞딱뜨리는 상황은 '지금 이 상황에선 담배를 피워야 하는데', 라는 것이다. 10년동안 담배를 피우면서 만들어 놓은 상황, 즉 담배를 피는 시기는 거의 고정되어 있었고, 그래서 지금은 담배 그 자체보다는 그 시간에 담배를 피웠다는 것에서 더 담배를 찾게 된다. 즉,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씻고 나오면서, 나와서 자리에 와서 간단히 정리 후 일 시작 전, 일을 한두시간 한 뒤, 점심 먹기 직전/직후, 오후 3~4시쯤, 저녁 먹기 직전/직후, 저녁 8시쯤, 9시쯤, 10시쯤, 가기 직전, 방에 들어 가기 직전, 잠자기 직전. 항상 이래 왔다. 그래서 저 시간들이 되..
보다 본연적인 것 의도적으로 세속적 기준에서 벗어날 것을 목표할 필요는 없음을 안다. 이것은 곧 내 행동이 세속적 기준에서 벗어나도 크게 개의치 않아도 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알려 준다. 일부러 '별나게' 행동할 필요는 없을지라도 내 행동이 결과적으로 '별나게' 받아들여진다 하여 그것을 억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에게 보다 본연적인 것은 내가 행하고자 하는 그 대로 행함이며 그것에 대한 타인들의 규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좇고 추구하는 것이 자본이 아닐 필요성은 내가 좇는 것이 자본을 부가적으로 생산한다는 사실 자체를 거부할 필요성까지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일부러 자본을 거부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보다 본질적인 것은 특정 행위이며 그것이 자본을 생산해 내는가 아닌가..
가치관 보이기를 두려워 하는 사회 냉소. 가치관 표현의 두려움. "내 것 처럼 아껴 쓰자"는 희안한 구호를 보았을 때부터 시작된 삐딱한 시선은 극도의 염세와 허무를 겨우 지나 지금에 이르렀지만 그 진창을 기어 나오면서 묻었던 얼룩이 여전히 남아 있기에 나의 냉소는 시작되면 극단을 달린다. 그나마, 과정에 포함된 몇 번의 주저함에 의해 여기저기 잘려 나가는 정도라서 글로 적을 수 있는 것이며 머릿 속의 생각은 황색언론의 그것들보다 더 노골적이다. "산다는 게 기껏해야 남들의 부러움이나 구걸하는 거냐?", 정도가 그나마 머리 속을 떠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랄까. 어차피 '인간' 사이에서 살 것을 선택하였고(이것은 정확히 내 고등학교 때의 일기장에 있는 구문이다), 체념적 긍정만이 내가 지금까지 생활하면서 배워 온 유일한 방어 기제인 지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