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영화

독서와 교양, 폐쇄성

by adnoctum 2011. 1. 11.


   한국 사회의 전반적 교양의 부재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멍청한 언론 - 난 언론에 부여된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할 수 없을만큼 한국의 언론은 그 기능을 상실했다고 생각한다 - 에서 허구헌날 반만년 찬란한 문화 어쩌구 하는 이야기와 세뇌교육의 폐해를 벗어날 수 있다면, 한국 사회의 교양 부재에 대해 찬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교양을 쌓는 것에 독서가 핵심이 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교양은 와인을 따를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양식을 먹을 때 어느 손에 무엇을 잡아야 하는지 따위의 '형식'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지에 관계된 것이다.


* 좋아하는 작가는?
* 가장 감명깊게 읽은 소설은?
* 좋아하는 철학자는?
* 리처드 도킨슨의 이기적인 유전자와 같은 그의 저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 엘런 소칼의 지적 사기에 드러난 인문학 분야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 주례사 비평이 판을 치고 기성작가가 신인작가의 작품을 모방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터지는 한국사회의 문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 한국의 서민들이 이명박 정부를 지지하는 것에 대한 원인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 원칙과 신념이 없는 한국 사회를 생각했을 때 우리가 한번쯤은 읽어 보아야 할 고전으로는 무엇이 있는지?
* 한국인들의 반도적(제한된) 세계 시각을 고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
*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이 매우 많은, 다른 말로, 섬나라에 살기 때문에 다른 문화에 대한 수용성이 매우 떨어지는 한국 사회에서 다민족 국가나 외국인 노동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내가 보았을 때 한국에서 많이 회자되는 사회/문화적 이야깃 거리들이라고 해 보았자, 마징가 Z와 태권V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가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TV 드라마/연예인/스포츠 이야기를 빼면 수많은 대화가 사라질 것이고, 수많은 종이/인터넷 신문이 자취를 감출 것이다.


   굳이 아시아 대륙의 한 구석에 짱박혀 지들끼리 지지고 볶으며 산다는 지리적인 면을 배제하더라도, 한국인들은 매우 폐쇄적이다. 아마도 이런 태도는 딱딱 정해진 것만 받아들이면 되는, 그리고 무엇을 거부하면 되는 것인지 명확했던 12년 혹은 16년 같의 학교 생활에서 기인하는 것 같으며, 그들이 사회로 나가 역시나 그와 비슷한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유승준이나 이영자, 신문선에 대한 비판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또한 그들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던 이들에 대한 사회적 암매장과 같은 마녀사냥까지도. 유승준의 거짓말, 이영자의 거짓말, 신문선의 '다소' 객관적이려 했던 말, 그러나 전과 14범의 대통령*주1).




    이와 같은 폐쇄성은 만약 독서를 해서 교양을 늘린다면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즉, 폐쇄성이란 자신이 평소 생각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반감 혹은 그러한 것을 인정할 수 없기에 반대하는 것이라 하면, 여러 상황을 간접적으로 겪고, 그러한 것이 얼만든지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끔 해주는 독서가 폐쇄성을 어느 정도 극복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읽으면서 아직도 그 내용을 잘 못 파악하고 있는 것 중의 한 구절은, 부부사이의 문제로 인해 고민하는 남자를 위해 니니가 무엇인가를 해 주었다는 부분이었는데, 이 부분이, 말 그대로 부인과의 잠자리에서 문제가 있는 남자를 위해 니나가 처음 만난 남자와 같이 자면서 원기(?)를 찾게 해 주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다소 보수적인 니나 언니를 깜짝 놀라게 한 것으로 보아 그와 비슷한 것일텐데, 그 부분으로 인해 나는 단 하나의 판단 기준 - 이 경우, 처음 만난 남자와의 하룻밤  비슷한 - 으로는 결코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장담하건데, 이 글을 읽는 이 중 누구도 니나를 욕할 수 없다.


    책 많이 읽는다고 거들먹 거리는 사람을 제외하면, 벽창호처럼 이야기가 안 통할만큼 융통성이 없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책을 안 읽는 이들이다.


    교양과는 별로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종종 경험하는 독서의 유용성에 대한 한 경험으로 이야기를 끝마치면, 나는 왜 '수'라는 것이 자연과학에서 그토록 중요할 것인가를 꽤 오랫동안 생각해서 하나의 결론을 내렸는데,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책에서, 같은 결론을 내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600년 전 사람이었다.



*주1) 만약 이 문단에서 논리적 응집성의 부족을 느꼈다면 제대로 본 것이다. 부연하자면 이렇다. 많은 이가 유승준/이영자/신문선을 비판했다. 그들이 비판받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더이상 생각해 볼 여지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잘못이 정말 그렇게까지 비판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한 번 결정된 생각 이외에는 더이상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 그것에서 폐쇄성이 보인다. 그렇다면 전과 14범의 대통령은 무엇일까? 충분히 보다 더 중대한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앞의 3 명보다 적은 지탄을 받는 것은, 확실한 모순이다. 이 경우 이 모순은 앞의 사건들의 과도한 사회적 지탄으로 인한 것이므로, 폐쇄성이 모순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ps. 여기서 잠깐. 혹자는 "그러는 너는 책 많이 읽냐?" 라거나, "그래, 너 유식해서 잘났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1. 만약 내가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하면, "그래, 지가 책 많이 읽는다는 거 뽐내고 싶은 거지?"
2. 만약 내가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고 하면, "너나 많이 읽어라. 지도 별로 읽지도 않으면서 남한테 뭐라는 거야."
결국 나한테 책을 많이 읽느냐고 묻는 것의 의도는, 내가 책을 많이 읽거나 적게 읽거나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나를 공격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하나만 묻자. 왜, 가 책을 얽마나 읽는지가 당신이 독서를 늘림으로 인해 당신 자신이 발전하는 것에 관련이 있는 것이지? 내가 책을 적게 읽든 많이 읽든 당신이 책을 많이 읽으면 당신은 발전한다니까. (실존적존재론적으로라면 모를까 존재론실존적으로라면 난 '인간군상'에 대해 매우 무관심하다구...) 이와 같은 논리는 타인의 비판을 수용할 때 항상 성립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 비판을 수용함으로 인해 내가 발전할 수 있다면, 그 비판을 한 사람이 누구냐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참, 그리고 난 일 년에 한 5권 정도는 읽는 것 같다, 주로 인문/철학/수필 위주로)

원본 작성일 : 2009-03-15 17:57
미몹 백업함


'독서.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0) 2011.03.01
즐거움에의 몰두  (0) 2011.01.29
초월한다는 것  (0) 2010.12.12
쇼펜하우어에 대하여  (6) 2010.12.12
삶, 죽음, 그리고  (0) 2010.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