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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_생각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푸른안개

by adnoctum 2010. 8. 9.
2008-09-23 00:44


   윤성재는 46세에, 회사의 사장이다. 이신우는 23살이며 휴학중이다. 어느 날 윤성재는 이신우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회사를 그만두며, 집을 나온다. 윤성재는 결국 지난 날 자신이 하고 싶어하던 작은 책방 주인이 되고, 이신우는 결국 자신에게 끊임없이 구애하던 민규와 결혼을 한다. 


  2001년 3월 24일부터 5월 27일, 20회에 걸쳐 한 후 끝난 KBS2 주말연속극 '푸른안개'의 내용이다. 과연 그 드라마에 '불륜'드라마라는 딱지를 붙인 후, 그 어떤 것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는 것이 불륜이라는 말로 몰아부칠 수 있을까? 글쎄.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방탕한 여자의 일대기라고,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를 우유부단한 남자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단순히 귀족들의 사랑 얘기일 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남자 나이 46세. 중학교를 다니는 딸이 있으며, 아내는 아름답고, 지적이며 이성적이다. 돈과 명예, 지위, 그 어느 것 하나 남부럽지 않은 사람이, 어느 날 문득, 내가 원하는 삶은 이렇게 허수아비와 같은 삶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사는 삶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단지 자신이 추구하던 삶이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지금 갖고 있는 그 많은 것들을, 안락함이 보장된 미래를 버릴 수 있을까? 말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못할 것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래,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원하는 삶은 이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가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아를 찾아 나설 수 없으며, 더구나 자신이 갖고 있는 보장된 안락한 미래를 버리고 그것을 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어느 날 문득 내가 원한 삶은 이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더라도, 두려움 때문에 계속 그냥 살아갈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추구하게 될 때 부딪히게 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지금 갖고 있는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드라마에서는 또 다른, 그와 같이 어려운 것을 가능하게끔 해주는, 그 두려움과 능히 맞설 수 있을만큼 맹목적인 것을 이용한다. 사랑. 



   아무리 회사의 사장 딸과 결혼을 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능력이 없었다면 사장자리에까지 오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에서 유추한다면 그는 자신이 23세의 여자를 사랑하면서, 그리고 그 사랑을 끝내 버리지 못함으로 인해 일어날 많은 일들을 결코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남자에게 '당신이 하고 있는 사랑은 인정받을 수 없어'라며 들이댈 수 있는 수많은 근거들을 그 역시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귀결을 허무러뜨리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느끼게 된 감정, 바로 사랑이었다. 


"어디까지 갔나요? 잤나요? 대답해 봐요."
"아무 일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다구?! 자지만 않았으면 아무 일도 없는 거야? 그애 사랑해여? 사랑하냐구 물었어여."
"미안해".
"미안하다는 건 무슨 의미죠?"
"태어나서 어떤 대상한테 이런 느낌, 처음이었어."
"당신 사람이야? 딸뻘밖에 안되는 어린 애한테. 당신 딸 주희를 봐서도 당신 이럴 순 없어. 별일 아니라구, 웃으면서 아무 일도 아니니까 신경쓰지 말라고 차라리 나한테 거짓말을 해주길 바랬어."



"그이는 지금 사랑을 하고 있어. 지금 연애를 하고 있다구!"



   그 사랑의 도움으로 그는 진정한 자아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삶이 무엇이며,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자신과 독대하게 된다. 그리고 나름대로 결론을 맺고, 그렇게 살아갈 것을 결심한다. 그렇게 끝이 난다. 만약 그에게 사랑이라는 마약과도 같이 강력한 것이 없었다면 그는 딸의 미래와, 회사에서의 중책과, 아내에 대한 헌신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결코 자아를 찾는 여정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신우는, 자신 직장의 사장(윤성재 선배)에게, 그 사장 부인(윤성재 부인의 친구)에게, 윤성재 부인에게, 신우 어머니에게, 윤성재 딸에게, 민규(신우를 계속 따라다니는 남자)에게, 신우와 같이 사는 언니에게, 그녀가 하고 있는 사랑은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전해 듣는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녀 자신도, 그리고 성재도, 모두 그것을 알고 있다. 



   "나도 괴로워. 아저씨가 자식도 없고, 부인도 없으면, 내 사랑이 얼마나 떳떳했을까? 사랑이 마음대로 되는 일이라서, 당장 오빠랑 사랑하고 결혼하고. 그럴 수 있었으면 아무 고민도 없잖아. 아저씰 사랑함으로 인해 아저씨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지, 내 자신도 얼마나 큰 상처를 받을지, 나도 두려워. 그렇지만, 그걸 다 알면서도, 내 마음을 내가 어쩔 수가 없어. 미안해, 오빠. 사랑을 두개쯤 갖고 있다면, 오빠한테도 하나쯤 나눠줄텐데. 난 사랑이 하나밖에 없어." 


   "정말 엄마 말대로, 아저씨 사랑한 것도, 나중에 후회할만큼, 아무것도 아닐까?" (무표정하게 말하는 신우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윤성재 사장이 너 데리고 미국가라고 얘기했던 날, 나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게 어쩌면, 희생이고 헌신일지 모른다는 생각 했었어. 진짜 사랑은 자기 욕심 채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게, 불행하지 않게 해주는 거라는 거, 그런 의미에서 지금 니 결심, 현명한 거야."
"난 현명해지고 싶은 마음, 조금도 없어."


 "내가 왜 이신우씨를 만나자고 했는지, 설명 안해도 알죠? 윤성재 사장이 먼저 이신우씨 유혹했어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러면, 이신우씨가 먼저? 젊음을 밑천으로, 나이 많은 남자들, 젊은 여자한테 무조건적으로 취약하다는 약점 이용해, 아무 죄의식도 없이 접근해서, 상대한테서 필요한 거 다 뽑아내는거, 그런 거 범죄행위야. 설마, 아버지같은 남자 유혹해서 가정 파괴시키고 한 남자 인생 파멸시킬 목적은 아니겠지. 이건 윤성재 사장한테만 치명적인 거 아냐. 생각없이 저지른 행동이 이신우씨 평생에 지울 수 없는 족쇄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해 줬으면 좋겠어. 그 용모로 얼마든지 나이에 맞는 남자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텐데, 뭣 때문에 여러 사람 피해주고 고통주고, 자신의 인생까지 망치려 드는 어리석은 짓을 해? 위험한 장난은 여기서 끝내. 얘길 듣자니까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학교도 휴학했다고 하던데, 돈이 필요하면 내가 주지. 얼마면 되?"
"돈이 그렇게 많으세요?"
"뭐?"
"전 돈같은 거 필요 없어요."
"돈이 필요 없으면, 뭣 때문에 처자식 있는 유부남을 만나?"
"우린... 서로 사랑해요. 아줌마처럼 돈이 많으면, 사람이 진실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시나본데, 참고로 말씀드릴께요. 저 아저씨한테 단돈 백원도 받은 적 없어요. 죄송합니다.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결국 신우는 성재와 헤어지고 민규를 따라 미국에 가고, 민규와 결혼을 한다. 그렇게, 결국은 그렇게 끝나고 만다. 비록 신우에게는 결혼하기 전 질풍과도 같은 추억으로 남게 되는 사랑이, 성재에게는 자아를 찾도록 해준 것. 또한 여자와 즐기고 노는 것만 알고, 그러다 유학을 갈 결심을 했는데 외로울 것 같으니 떠오른 사람을 사랑한다 자기최면을 걸던 민규는, 성재와 신우의 사랑을 보며 진정한 사랑을 배워 나간다. 드라마 초반에는 제멋대로 신우를 대하던 성재의 태도는,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더 신우의 아픔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옆에서 보듬어주는 태도로 바뀐다. 윤성재 사장에게도, 처음에는 '당신'이라 했지만 나중에는 결국 '사장님'이라고 부르게 된다. 주희(윤성재 딸)은, 아버지도 아버지 이전에 한 명의 남자이고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물론 사랑이 이야기의 주요한 뼈대를 이루기는 하지만, 나는 그보다는 오히려, 윤성재 사장의 자아 찾기를 도와주는 조력자로 사랑이 쓰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된 자신의 현실과 자아와의 괴리를 좁히기 위해 새로운 여정을 떠날 때의 그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줄만한 것, 그럴만한 것은 사랑과 같이 강력하고 무모하며 비논리적인 것밖에 없을테니까. 오히려 이 드라마는 불륜 이야기라기보다는 자아 찾기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성재와 신우의 대화 속에서, 또한 민규의 변하는 태도와 말에서도 사랑이 무엇일까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묻어나오기도 하지만. 


- 미몹 백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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