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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

by adnoctum 2005. 11. 4.

그런 것은, 없다.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의 처지를 100%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다. 관건은 100%라는 "완전함"이 아니라, 결코 다른 사람의 처지를 '잘'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직접 그 상황에 처해보기 전에는, 그런 문제로 인해 고민할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나 처지를 이해한다는 말은 때때로 가소롭기까지 할 정도이다. 왜냐 하면, '내가 고려할 수 있는 만큼만 너의 입장을 배려해 주지'라는 의미를 내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말을 하는 당사자는 자신이 이런 가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감소시킨다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된다.



   왜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울까? 그것은 아마도 '존재'와 '실존'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쉬운 말 찾으려다, 귀찮아서 그냥 쓴다). '존재'와 '실존'의 차이는, '죽음'을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죽는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숙명이다. 따라서 지구촌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 바로 이 순간 죽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별다른 감정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 왜냐 하면, '죽음'이란 인간이라는 존재의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부모님, 자식, 남편(아내)의 죽음을 실제로 맞딱뜨리게 되면, 그 문제는 '나'라는 '실존'의 문제가 된다. 초상집 가서, "죽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니까 슬퍼하지 마세요." 하는 것은 '실존'에게 '존재'를 강요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처럼 어떤 문제를 '존재론적'으로 받아들이느냐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타인은 우리에게 어쩔 수 없는 타인일 뿐이다. 그래서 타인의 문제는 대부분, 아니 항상 존재론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즉, 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쉽게 말할 수 있다.



   내가 그 상황을 직접 맞딱뜨리기 전에는 결코 볼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그 작은 문제들을 무시하고, 우리는 '쉽게' 이해한다라는 말을 한다. 문제들을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는 것 이전에, 그러한 문제를, 사소하나마 고려해야 한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쉬워 보인다. 그러나, 그리 녹록치 않다.


   아마도 자식을 가진 부모들이 너같은 자식 낳아서 길러 보아야 한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은 이런 연유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결코 경험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



   물론,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좀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 특히 그리 심각하지 않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도움이 되는 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그렇다고, '나도 그랬었다'라는 것으로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도 시덥잖다. 왜냐 하면,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는 인생사가 한낮 꿈에 불과하듯, 그 상황을 지난 사람에게는, 지나버린 일들은 단순히 '과거'일 뿐이다. 그 과거를 '현재'로 살고 있는 사람과, 단순한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죽을 때 한낮 꿈에 불과하게 느껴질 인생을 지금 아둥바둥 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결코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이해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해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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