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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_비분류/과학_생각

자연과학에 대하여

by adnoctum 2010. 5. 27.

2007-10-31 20:29


(아주 오래 전의 홈페이지에 있던 글. 대략 2004년 봄 정도인 것 같다. 그 때는 이런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 시기였고, 그 고민의 결과가 이 글이다. 비록 지금 보면 좀 우스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그것인 것을 아는 것과, 왜 그것이 그것인지를 아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단순히 그렇다는 '사실'만 을 아는 것은 진정으로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이 그것인 것은 알겠는데 왜 그것인가, 이것을 아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현상의 원인이나 이유를 한없이 따라가며 '왜'라는 물음을 던지면, 결국 왜 그런지 알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혹은, 그냥 '그렇게 하자'라고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 그 상황에 도달하게 된다. 훌륭한 많은 선인들은 이것을, 물자체(칸트), 이데아(플라톤),道(노자,장자) 등으로, 그 존재를 생각하는 사고를 개념화시켰다('그것을 생각하는 사고'를 개념화시킨 것에 유의해야 한다. 이데아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우리의 사고가 있는 것이고, 그 사고 작용의 대상을 이데아라고 한 것이다.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도덕경-)[각주:1] 어떤 것을 순수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 자체와 직접, 직관을 통하여 작용해야 한다. 이처럼 사고의 대부분은 한없는 소급의 결과, 모를 수밖에 없는 사실들을 기본 전제로 인정한 후, 그렇게하여 만들어진 것들을 갖고 이리저리 꿰어 맞추는 작용을 하는 것이 본질이다. 자,이제 어쩔 수 없이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음을 읽어 나가도록 하자.[각주:2]



 사고의 재료가 될 수 있는 것은 크게 2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모르는지 아는지' 아는 것'과 ''모르는지 아는지 , 그것조차 모르는 것'. 후자의 것은 그것이 전자의 것이 되기 전에는, 아예 우리의 사고 영역 안에 들어올 수조차 없는 것들이다. '모르는지 아는지, 그것조차 모르는 것', 그것은, 자신이 모르는 것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밖에는 개인에게 존재할 수 없다. 즉, 개인에게 있어 그것이 존재하는 순간은, 자신이 '모르는지 아는지, 그것조차 모르는 것'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그 찰나밖에 없다. 왜냐 하면, 그 전에는 아예 그것조차 모르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그것,'모르는지 아는지, 그것조차 모르는 것'을 깨달은 그 직후에는, 그것은 더이상 '모르는지 아는지, 그것조차 모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각주:3]. 따라서 그것의 예를 드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즉 , 나는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다고 생각하고, 말해야 하는, 즉, 존재하지 않는 어떤 그것을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내가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존재 여부를 판단한 것인데, 어떻게 그 존재 여부를 판단하기 전의 예로 들 수 있단 말인가?[각주:4]



  인식의 폭이 넓어졌다고 하는 것은, 모르는 것은 알게 한 것(도대체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을 의미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모르는지 아는지, 그것조차 모르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드디어 어떤 것에 대해 사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아야만, 즉 모르는지 아는지를 알아야만, 비로소 그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연 과학은 대체로, 전자의 것, 즉 모르는 어떤 것을 알아 가는 과정과 후자의 것, 즉,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 과학에서의 혁명적 발전은 대체로 후자의 것으로 이루어진다. 왜냐 하면, 전자의 것은, 알고 있던 어떤 조각들의 연결 구조를 드디어 찾아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의 것은, 어떤 연결선을 그을 수 있는 대상 그 자체를 발견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 과학은, 따라서, 왜 그런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들의 상호 작용이다. 자연 과학의 발전이란, '모르는지 아는지, 그것조차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그 결과를 가지고 전에는 '그냥 그렇다'라고만 하던 것을 세분화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A+B=>C일 때, 왜 C이냐면, A, B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A 혹은 B인가? 그것은 모른다. 하여튼 A이다. 이 때, '모르는지 아는지, 그것조차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모르는 것을 알아 내어 A'+A''=>A인 것을 알아낸다. 그러면 이제 왜 A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즉, A',A''이기 때문에 A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A'인가? 그것은 모른다. 더 발전을 하면, A가 A',A''로 설명될 수 있었던 것처럼, A',A''도 다른 것으로부터 설명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자연 과학이 발전되어 온 모양이다. 




  자연 과학의 도구로 수학이 쓰이는 것은 아주 적절한 선택이다. 수학이 자연 과학, 특히 물리학,의 도구로 쓰이는 것은 2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첫번째는 '왜' 그 현상에 '그 수학 공식'이 맞는가와, 두번째는, 그렇다면, '그 수학'은 '왜 그렇게 되는가'이다. 후자는 수학 그 자체에 관한 것으로, 수학은 이에 대한 아주 적절한 해답을 갖 고 있다. 바로 공리와 정의이다. 공리는 '증명할 순 없지만, 그냥 그렇다고 인정하자'라고 한 것들의 집합이다. 가령, '2개의 점을 잇는 가장 짧은 경로는 직선이다'같은 것들. 정의는, '그렇게 하자'라고 약속한 것들의 집합이다. (-1)X(-1)=1인 이유는, 정수 체계를 만들 때, 곱하기 연산자 X 를 정의했는데, 그 결과 저런 상황이 나오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즉, 곱하기의 정의에 의해 저런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지, '음수와 음수의 곱을 양수로 하자'라고 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수학은 공리와 정의를 가지고 정리를 만들어 내는 학문이다. 수학이 자연 과학에 적용되는 경우는 '정리'가 사용되는 경우이고, 그 정리의 증명은 수학 분야에서 정의와 공리를 갖고 행하게 된다. 따라서, 수학을 도구로 사용하는 입장에서 정리를 이용할 때, 그 정리가 왜 그렇게 되었는가는, 공리와 정의를 갖고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현상이 수학적으로 표현이 되었다면, 그것이 왜 그처럼 수학으로 표현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수학적 방법이 그 현상을 설명하도록 변형,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즉 보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양자 역학은 결국 수학이지만, 거기서 쓰이는 수식은 관찰된 현상과 모델에 맞게 끊임없이 수정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당연히 수학과 현상은 맞게 되는 것이다. F=ma. a는 무엇인가? 속도의 시간에 대한 미분. 속도란? 단위 시간동안 이동한 거리. 여기서 더 들어가면, 단위 시간이란 무엇이고, 거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와 만나게 된다. 표준 일초는 외부에서 아무 방해를 받지 않는 세슘원자가 9,192,631,770 번 진동하는 시간으로 정의되었다. 1미터란, 빛이 진공 상태에서 299,792,458 분의 1초동안 진행한 경로의 길이로 정의되어 있다. 이제는 F=ma 에 대해 더이상 왜 그런지에 대해 알 수 없다. 그냥 그렇게 정의했기 때문이다. 



  왜 entalphy에 대한 식이 H = E + PV 이고, entrophy에 대한 식이 dS = q/T 이고, Gibb's free energy에 대한 식 이 G = H - TS 인가? 그것은, 그렇게 정의하니, 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Michaelis-Menten Equation은 왜 v0 = Vmax / ( 1 + Km/[S]) 인가? 그것은, 그렇게 정의하고, 여러 현상을 관찰하니, 유용했기 때문이리라. 



  유기 화학을 배우는 동안은 새로운 이론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혹은, '무조건 갖다 끼워 맞추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기본적인 논리는 존재한다. 화학은 결국 전자와 양성 자(그리고 중성자)들간의 interaction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interaction을 정확히 구명해내기가 매우 어렵다[각주:5]. 물론 우리에겐 Hamiltonian Equation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수소 분자만 넘어가면 우리의 손을 떠나게 된다. 결국 유기 화학은 모두 외워야 하는가? 지금 당장 유기 화학 책을 펴고 ,반응들을 살펴 보라! 그 모든 반응을 어쩔 수 없이 외워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유기 화학 책의 수명은 거기서 끝이다. 그러나 잠깐. 유기 화학에도 공리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pKa. 통계학과 통계 열역학, Hamiltonian Equation을 이용하면, 2차 방정식의 근의 공식처럼, 유기 화학의 반응도 기계적으로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것은 실용적인 부분을 넘어 선다. 즉, 이론적으론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계산 불가능하다. 따라서, '관찰 결과, 그렇더라'인 것이 pKa. 이다. 물론 pKa도 어느 정도 경향성은 예측 가능하나[각주:6], 모든 분자의 pKa를 정확히 알아내는 방법은 오직 실험뿐이다. 화학과 물리 분야에 수많은 table 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따라서 유기 화학은 pKa와 일반화학적 지식을 근거로, 유기 화학에 나오는 일반적 논리를 따 라가면서, 모델을 제대로 이해하여, '예측'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model이라는 것이다. 그것 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뿐, 현상 그 자체의 본질은 아니다[각주:7].



  생물학, 가령 signal transduction이나 enzyme의 mechanism,에서, 어느 단계에서는 결국 그것들을 일일이 외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각각의 분자 사이에 작용하는 정확한 interaction을 수치화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enzyme의 active site와 substrate의 interaction을 수학적으로 정확히 계산해내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substrate와 inhibitory competetition관계에 있는 물질을 찾기도 쉽고, 그러면 신약 개발도 한결 쉬울 것이다. 생체 분자들의 상호 작용을 양자역학적 측면에서 정확히 계산해 낼 수 있다고 하면, 생물학은 지금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될 것이다.


  1. 비슷한 개념으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있는 '신'에 관한 언급이 있다. ['신은 이름을 가질 수 없다. 이름은 언제나 한 사물이나 사람, 즉 유한한 것을 나타낸다. 신이 사람이 아니고 사물 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름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이 같은 변화 중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성서 이야기 가운데 신이 모세에게 계시하는 부분이다. 모세가 신에게, 헤브라이 사람들은 그들에게 신의 이름을 말해 주지 않는 한 신이 그를 보냈다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우상의 본질은 이름을 갖는 것이니, 이름없는 신을 어떻게 그 우상 숭 배자들이 이해할 것인가?) 신이 양보한다. 신은 모세에게 자기 이름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말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내 이름이니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신은 유한하지 않으며 '존재'가 아님을 의미한다. 이 문장의 가장 적절한 번역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들에게 '나의 이름은 이름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하라. 신 의 형상을 만들지 말고, 헛되이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궁극적으로는 신의 이름을 전혀 입에 올리지 말라고 금지 하는 것도 같은 목표, 즉 신은 아버지이고 신은 사람이라고 하는 관념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주려는 데에 있다. 그 뒤 의 신학의 발달 단계에서 이 생각은 더욱 발전하여, 인간은 신에게 어떠한 원급 한정사도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 로 된다. 신에 대해 신을 현명하고, 강하고, 선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시금 신은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신은 '~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이중 부정의 한정사를 사용하는 것, 신은 제한되어 있지 '않고', 불친절하지 않으며, 불의를 행치 않는다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나는 신이 '~이 아닌지'를 알게 될수록 신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된다. 일신론의 사상이 성숙되어 감에 따라 그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다만 한 가지, 신의 이름을 전혀 언급하지 말고, 신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는 것 뿐이다. 이 때의 신은 일신론적 신학에 있어서 잠 재적으로는, 현상적 우주의 기초에 있는 통일성, 즉 모든 존재의 근거를 가리키는 이름없는 자, 형언할 수 없는 자가 된다. 신은 진리,사랑,정의가 되는 것이다. 신은 내가 인간인만큼 나이다.] 프롬이 말한 신의 개념을, 道, 물자체, 이데아의 개념과 같은 맥락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본문으로]
  2. 더 정확한 개념을 얻고자 한다면,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14,15장을 읽을 것을 권한다. 또한 Science에 실린 Chew의 내용. [본문으로]
  3.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생각할수록 심오한 말이다. 이 말을 하는 소크라테스에게 누군가가 물었다고 한다. '그런 당신은 당신을 아십니까?'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아니오. 그러나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나 당신들은 당신들이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지 않소" [본문으로]
  4. 마치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에서 오류를 찾아내고자 했던 나의 친구가 빠졌던 오류와 비슷하다. 그는, '존재 하지 않으면서, 생각은 하는, 그런 것이 있을까?'하고 물었었다. [본문으로]
  5. 흔히 알고 있는 O2의 모양조차 정확히 구명해내지 못하고 있다. [본문으로]
  6. 그러나 그 때 사용되는 일반화학적 지식은 그냥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본문으로]
  7. aromatic compound의 electrophilic substitution은, kekular 식으로 그려서 생각하면 당연한 것 같지만, 그것은 모델이 현상에 제대로 맞은 경우이다. 혹은, naphthalene의 각 C 사이의 거리가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다. kekular 식으로 그렸을 때, 2중 결합성격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쪽이 짧은 이유가, 공명 구조가 그렇게 그려지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즉, 그림을 그려보니 그곳에서 2중결합성이 가장 강해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그것은 모델로 현상을 설명할 수는 있는 것이지만, '왜' 그렇게 되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궁금해 교수님에게 물어 보았는데, 그 교수님은 고급유기화학에서는 hyper-conjugation이라는 모델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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