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경우, 질문은 "이것은 과연 될 것인가?" 에 초점이 맞추어 진다. 그것은 좋지 않은 질문의 방향이다. 질문은, (난 이것을 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것을 할 수 있을까?" 라고 해야 한다.
나는 이런 글(선택과 결정의 전과 후)을 쓴 적이 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 나는, '아, 나는 과연 외국으로 나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얼마 후, 곧, 지금 이 글의 생각과 같은 것을 나에게 적용하여,
'나는 외국으로 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아닌,
'외국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 하면, 전자의 경우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한 과정이 구체적이지 않다. 적절한 전략을 세우기 힘들다. 갈 수 있을까? 없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딱히 적절한 것이 없다. 무엇인가 '알아 보는 것' 정도? 그러나 질문을 후자와 같게 한다면 그 구체적 방법들을 찾게 된다. 즉, 질문의 목적 자체가 '외국으로 나가기 위한 방법'에 초점이 맞추어 진다. 그리고 이 질문은, 외국으로 나갈 수 있다는 전제 하에 해결책을 찾게 된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질문을 전자처럼 "될까? 안될까?" 로 하면 그 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끊임없이 생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한 전략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니라, 될 수 있는 방법과 될 수 없는 방법, 되지 않을 가능성에 대한 적절한 예들에 관심을 갖게 된다. 즉, 될 수 있는 이유와 안 되는 이유를 모두 고려하게 됨으로 해서 부정적인 시선을 갖게 된다. 아무리 긍정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이유들을 찾게 되면 십중팔구 부정적 결론에 도달하게 될 뿐이다. 이러한 부정적 시각은 언제나 우리를 조금씩 갉아 먹는다. 알게 모르게 부정적 시각에 물들어 결국은 그렇게 된다. 아주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모를 뿐이며, 그것은, 바로 그래서 더 위험한 것이다. 자신이 부정적으로 된다는, 자신이 부정적 결론으로 도달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중간에 그것을 적절히 제어하기 위한 행동을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문의 방향은 "되게 하고 싶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로 해야 한다. 이에 대단 대답을 하기 위해선 우선 된다는 것은 결론으로 정해져 있고, 그것을 되게 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를 찾게 된다. 매우 다르지 않은가?
물론,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100% 달성하기 매우 힘들다. 재미있는 것은, 특정한 목표를 실제로 완수하기 위해 가졌던 목표가 서서히 달성되어 가면서 처음에 가졌던 목표가 조금은 변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직접 해보니 처음에는 몰랐던 더 좋은 목표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애초에 가졌던 계획이 나무랄데 없이 완벽하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그런 계획은 다소 현실적으로 무리한 것일 수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일단 어느 정도는 뭔가를 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될지 안될지를 고민하는 것보단 된다고 가정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 후 그 결과를 행동으로 옮겨 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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