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만인지 알 수 없는 기간. 나는 그동안 어느 정도 힘겨웠는데, 그것은 어떤 사건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 그럴 수도 있겠지만 - 이따금씩 일어 나는 생에 대한 의문과 삶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것은, 자발적 동기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에게 스스로의 욕망이 없어질 때는 살아 가기 매우 힘들다는 것이고, 그것은 자주 '우울함'이라는 감정이나 우울증이라는 병의 일부로 이야기되는데, 어찌 되었든 그것을 지나가고자 한다면 그 방법은 아직도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의 다른 많은 것들이 그렇듯 이 경우도 결국 시간이 해결을 해 주긴 하는데, 내가 이번에 느낀 것들은 이렇다.
자체로 생기는 욕구/욕망/의욕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해 살아 가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내부에서 이러한 것들에 대한 회의가 스믈스믈 기어 나와 그 무의미함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굳이 힘들게 삶을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어 진다. 어차피 타인의 시선이나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자신만의 아쉬움이라거나 하는 것들은 그 전에도 별로 의미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 내는 욕망의 상실은 곧 무욕망 = 죽음, 으로 귀결된다. 이 때, 남겨질 누군가라던가, 그러한 것이 약간의 고려 사항이 되긴 하지만 어차피 살아 있는 것들은 또 그렇게 살아 갈 수 있음을 알기에 행동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생물학적 근연관계의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는 고양이, 정도가 조금은 더 마음을 거스르게 하는 요인 정도였다. 그러니까, 스스로 만들어 낸 욕망에만 의지해 살아갈 때는 좀처럼 벗어 나기 힘든 시기가 올 수도 있는 것이지.
이 때. 우선 위안이 되었던 것은 조금은 쌀쌀해진 날씨였다. 운동 삼아 걸어 다니기를 시작한 지 두어달 즈음이 되는 때에 이런 시간이 시작되었던 것인데, 그 때가 또 늦가을을 막 지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밝은 햇살에 공기는 조금씩 차가워지곤 했다. 기계적으로 몸을 일으켜 연구실로 이동을 시키면서 만나게 된 풍경과 차가운 공기는 내게 약간의 욕망을 불러 일으켰다. '살아야 할 이유', 를 당위적 속성으로 생각해서 '내가 계속 살아가야 할 이유', 그래야만 할 그 무엇이 있는가를 끊임없이 되묻던 상황에서 만난, 조금은 일반적이지 않은 출퇴근길의 풍경과 공기는 당위성 없는 욕망을 일깨워 주었다. 그러니까, 해야 할 이유나 의무감이 없이, 단지 더 느끼기 위해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구나.
또 하나는, 기계적이고 어느 정도는 강제적으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주위의 사람들과 갖는 일상적 관계들이 어느 정도 활력을 찾아 주었다는 것. 사실, 지금까지 이러한 것에 큰 의미를 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외려, 요즘에는 지금보다 더욱 더 심하게 고립되길 원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요즘엔 대부분 밥도 일부러 혼자 먹고 있으니까. "난 고립의 길을 가겠어."라고 농담반진담반으로 말을 하기도 했었으니까. 주위의 사람 중에 싫은 누군가가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많은 욕망을 놓아 둔 사람에게는 싫다는 그 감정 자체도 일종의 사치일 뿐이니까. 주위 사람들과 특별한 일이 있었다거나 한 것 역시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었고, 지극히 반복적이었던 날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생활들이 나의 몸을 움직이게 했고, 사고 행위를 유발시켰다. 어쩌면 익숙한 일상 속에 나를 담군 것이 여태까지 내가 익숙히 하던 행동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을 것이고, 그것은 곧 어떠한 "따름" - 그것에 무엇을 따르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 을 이끌어 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무엇이 됐든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이 나를 다시금 움직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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