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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는 일어서서 창백한 얼굴로 심장을 두근거리면서 방을 나섰다. 그 주에 느꼈던 피로감이나 무기력감은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혀를 깨무는 한이 있어도 합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틀림없이 개스비가 낙방을 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눈을 쳐드니 로버트 어베이가 애교 있는, 어딘가 유머스러운 미소를 띄우고 그를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어베이가 뜻밖에도 그렇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앤드루는 더듬는 것 같은 목소리를 냈다.
"개스비 박사한테 실수를 한 것 같아서요...... 그뿐입니다."
"그런 걱정은 말고 여기 있는 표본을 보시오. 그리고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해보시오."
어베이는 격려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면도 자국이 선명한 불그레한 얼굴을 가진 그는 65세 가량 되어 보였으며 이미가 넓고 길쭉한 윗입술이 유머스러한 인상을 풍겼다. 어베이는 지금은 구라파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명한 의학자지만 청년시절의 악전고투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지방에서의 평가만 믿고 고향인 리즈를 뛰쳐나와 런던에서 온갖 편견과 반대에 부딪친 적도 있었다. 그는 슬그머니 앤드루를 바라보면서 바느질 솜씨가 나쁜 양복, 소프트 칼라나 와이셔츠, 잘못 맨 싸구려 넥타이, 그리고 특히 그 진지한 얼굴에 떠올라 있는 비상한 긴장감 등을 보면서 촌스러웠던 청년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의 마음은 본능적으로 이 이색적인 수험자에게 끌린 나머지 눈앞에 놓인 성적표 쪽으로 가서 특히 최근의 실기시험 성적이 합격 수준을 상회하고 있음을 만족스럽게 주목했다.
앤드루는 그사이에도 뚫어지게 눈앞에 놓인 유리병을 응시한 채 표본에 대한 설명을 씁쓰레한 기분으로 더듬거리며 주워섬기고 있었다.
"좋아."
어베이가 갑자기 말했다. 그리고 표본 한 개를 집어 들고는-그것은 대동맥의 동맥류였는데-친밀한 태도로 앤드루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그 질문은 처음에는 간단했으나 차츰 범위를 넓혀서 전문적이 되어 나중에는 말라리아의 감염에 의한 최근의 특수요법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어베이의 동정적인 태도에 마음이 놓인 앤드루는 충분한 답변을 할 수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표본을 놓으면서 어베이는 말했다.
"자네는 동맥류의 역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는가?"
"앙브르와즈 파레(16세기 프랑스의 의사. 프랑스 근대외과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짐)가......"
앤드루가 말을 꺼내자 어베이는 벌써 찬의를 표시하면서 끄덕이기 시작했다.
"맨 먼저 그것을 발견했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어베이의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왜 '추정'이란 말을 쓰나? 사실 파레가 발견한 것이 아닌가?"
앤두르는 얼굴이 빨개졌다가 곧 파랗게 질리면서 더듬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네. 교과서에는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어떤 책에나 모두 그렇게 씌여 있습니다. 저 자신도 여섯 권쯤 읽고 확인했습니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새삼 라틴어 공부를 하다가, 라틴어는 다시 배울 필요가 있었습니다만, 우연히 켈수스(고대 로마의 학자로 의학에 관한 저술이 8권 있다)를 읽다가 '동맥류'라는 어휘를 발견했습니다. 켈수스는 그때 이미 동맥류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세밀하게 거기에 대해서 씌여 있었습니다. 이는 파레보다 13세기나 앞선 때의 일입니다."
그대로 침묵이 흘렀다. 온정 있는 야유라도 받겠거니 각오하면서 앤드루는 눈을 쳐들었다. 어베이는 불그레한 얼굴에 묘한 표정을 띄우면서 그를 보았다.
"닥터 맨슨."
이윽고 경은 말했다.
"이 시험장에서 독창적인 것, 진실한 것,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 건 자네가 처음이네. 정말 반갑네."
앤드루는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
"다시 한 마디 대답해 주려나. 이건 내 개인적인 호기심의 문제지만."
어베이는 말을 끝내려고 하면서,
"자네는 자신의 주의로서 어떤 신조를 가지고 있나? 말하자면 기본적인 신념이라 할까, 자네의 직업을 실제적으로 응용할 경우에 말일세."
앤드루가 필사적으로 생각하는 동안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이윽고 그는 여지껏 쌓아 올린 좋은 결과가 모두 엉망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불쑥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저는 어떤 일이라도 처음부터 덮어 놓고 믿지 말자고 늘 제 자신에게 타이르고 있습니다."
"좋아. 맨슨."
앤드루가 방에서 나가자 어베이는 펜을 집어 들었다. 경은 자기가 다시 젊어진 것 같은 웬지 좀 감상적인 기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만일 저 청년이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려 한다거나 고민하는 인류를 구제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면 나는 아마 실망해서 낙제점을 주었으리라.' 어베이는 앤드루 맨슨의 이름 옆에다 전대미문의 최고점인 백점이라고 썼다. 사실 어베이가 마음대로 할 수만 있다면 - 그것이 그의 숨김없는 기분이었지만-그 숫자는 두 배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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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Archibold Josep Cronine, 2부 10장.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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