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구관련/연구생활

깊이에의 강요?

by adnoctum 2013. 1. 11.




   요즘 꽤 많은 주제를 갖고 연구를 해 나가고 있는데, 언제부턴가 원인 모를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뭔가, 분명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꼭 집어 말하기 힘든, 그러한 답답함. 그것은 연구 주제 혹은 깊이에 관한 것이었는데, 여러 주제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주제들이 결국 있는 데이터 깔짝대서 만들어 낸, 간단한 것들 같다는 것이었다. 그냥 간단하게 생각해서, 데이터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만들어 낸, 그런 것들, 깊이가 없는. 바로 여기서 내가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어제 토의 도중 명확히 알게 되었다. 


   novelty라고 하는, 참신함이 연구 주제 속에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뭔가 근본적인(fundamental) 것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어떤 질병에 관련된 특성을 보일 수 있는 유전자가 10개 알려져 있는데 내가 이 유전자도 해보니 그렇더라, 뭐, 그런 식의 단편적인. 물론, 지금 하고 있는 주제가 전부 저렇게 단순한 것들은 물론 아니다. 어찌 보면 참신한 것일 수도 있기는 한데 나한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일 뿐. 뭐, 그래, 가끔 이 곳에 말했듯이, 이런 점에 있어선 나 자신에게 그 누구보다 회의적이고 철저하게 비판적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든 것인지도 모른다. 이 답답함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그런데, 다행인 것은, 지금 하는 일 중에 위와 같은 회의를 빠져 나갈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기대하기로는 실험까지 잘 되면 교과서에 한 줄 정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근본적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느끼는 이 답답함이 다행히 정답을 하나는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래서, 그것을 표지석 삼아 앞으로 주제를 만들 때 단순히 '할 수 있는 것'보다는 뭔가 근본적이고 참신한 것에 더 촛점을 맞추어야 겠다. 





   이 글은 연구 생활에 관한 글인데 제목을 저렇게 해 놔서 분명 파트릭 쥐스킨트의 글 때문에 들어 오는 사람도 있겠지... 어찌 보면 이런 일 자체도 깊이에의 강요인가... 뭐, 좌우지간, 쓰는 김에 그 글에 대한 글도 나만의 방식으로 한 번 써 본다, 글 내용 요약 따윈 관심 없고, 나에게 그 책이 어떤 느낌을 주었는지, 내 생활에, 생각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어쩌면 내가 연구 주제에 대해 자주 깊이가 없음을 느끼는 것은 내가 깊이 있게 더 끌고 나가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난 그게 강요라고 생각진 않는다. 그래서, 사실, 연구와 같이 어느 정도 깊이가 필요한 경우라면 쥐스킨트의 글이 맞지 않을지도 모르지. 뭔가, 소설 소나기에 나와 있는 보라색을 죽음의 색과 연관시키려 하지만 그냥 작가가 보라색을 좋아해서 보라색이라고 한 것일 뿐인 것처럼, 과잉된 해석은 때때로 깊이에의 강요를 하지만 가볍게 쓰고 넘길 수 있는 것들, 혹은 가볍고 웃고 넘길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까지 주구장창 깊이를 요구하는 것은 물론 나도 가볍게 무시하는 바이다. 


   워낙에 형식적이거나 권위적인 것에 대해 무시를 잘 하는지라, 쓰잘데기 없이 깊이를 강요하며 에헴 거리는 경우에 대해선, 속으론 막말로, 그리고 가끔 실제로도, 소위 말하는 '교양없는' 태도로 대하면서, ㅋ,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거나 논리적으로 복잡한 문장 구조를 만듦으로 해서 내 나름대로는 그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다. 논리적 응집성을 크게 잃지 않으면서 길게 말을 하지만 단어들은 속된 것들을 사용하거나, 짧게 말하지만 단어는 속된 것과 전공/전문 용어를 사용하거나, 하는 식으로, 그런데 실제 내용은 그냥 들으면 장삼이사나 하는 얘기인 것 같이. 아마도 대척점 비슷한 것에 있는 것이 영화 아메리칸 싸이코 정도 되려나. 잘 차려 입고 헛소리를 해대는.



   뭐, 사실, 위는 결국 나의 삐딱한 성향일 뿐이며, 그것은, 내가 권위를 무시할 때, 깊이를 앞세워 권위를 세우려 할 때 그것을 가볍게 무시하면서 복수하는 소심한 방법일 뿐이다. 얼마 전에도 아는 아이와 얘기했지만, 내가 비록 일상적인 대화를 즐겨 하는 것은 아니며, 쓸데없이 진지한 얘기를 할 때가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런 태도를 좀 싫어 한다. 사람이 항상 진지할 필요도 없고, 때때로는 실이 없어도 되지 않는가. 그것이 내가 비록 여러 사람과 진지한 얘기를 언제든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실없는 행동이나 헛소리 정도의 우스꽝스러운 얘기를 하는 이유이다. 네이트 온 창에 갑자기 밥 이란 글자를 한 1000자 정도 써서 밥을 먹자고 한다거나, "오예, 서버 죽었다! 놀아야지, 큭큭큭", 과 같은. 친구 녀석 말이, 사람이 평소엔 실이 없다가도 술을 먹으면 진지해 져야지, 하더군. 참 인상적인 말이다. 보통은 반대이니까. 


   깊이가 싫지도 않고, 오히려 깊이를 추구하려 하지만 그것이 제 잘난 척이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때를 싫어하는 것이지, 결국 나는. 진짜 깊이가 있는 사람들은 외려 스스로 그것을 내보이려 하지 않아도 숨길 수가 없더라. 그러니까, 어쩌면 깊이에의 강요를 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깊이없음에 대한 방어 기제일지도 모르겠다. 




'연구관련 > 연구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랜만에 잘랐다  (0) 2013.01.28
이거슨 아침  (1) 2013.01.28
하루를 마치고  (4) 2012.12.30
청개구리 생활  (0) 2012.12.28
프랙탈처럼 얼음이 얼어가고  (0) 2012.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