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어느덧 10여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있던 20대의 어느 날. 나는 여전히 많은 것을 원하고, 그리고 그만큼 많은 것이 부족하였다. 무엇인가 앞날에 펼쳐질 그 무엇들. 좀 더 열심히 살아서 그것들을 더욱 더 멋지게 만들고, 그래서 지금 부족하다고 느끼는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싶었다. 그렇게 달음박질을 치던 어느 날, 여차저차 하여 1년 휴학을 하고 잠깐 사회 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겪고 다시 돌아간 학교. 참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아니, 내가 그만큼 변했을 뿐 학교는 그냥 그대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별로 알고 지내지도 못했던 동기들 중 몇몇은 이미 군대를 가 있었고, 나머지 아이들은 3학년이기 때문에 단과대 도서관에서 잘 나오지 않았고, 난 그냥 이공계 캠퍼스 도서관에서 주로 공부를 하며 지내고 있었다.
워낙에 공부라는 것을 열심히 하지 않는 편이기도 했고, 더구나 대학 들어가면 좀 달라질까 했던 수업방식을 비롯한 여러 교육체계가 기대했던 것과 너무 달라서 더더욱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할 무렵 그 책을 읽게 되었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내가 그 책을 읽게 되었는지 명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느 책의 가장 뒷면에 있는 몇 줄의 소개글이 발단이 되었던듯 싶다. 본교 쪽에 있는 중앙도서관까지 일부러 찾아 가서, 그 당시만 해도 폐가실로 운영되던 곳에 가서 신청용지에 책 제목을 적고 직원에게 건넌 후 얼마 있다 받은, 낡디낡은 책. 너무나 낡아서 이 책밖에 없느냐고 묻자 얼마 간 뒤에서 찾다 나오면서 유명한 책인데 왜 이것밖에 없는지 모르겠다며 그냥 보라고 한다. 그래서 읽게 되었다. 아, 생각해 보니 생의 한가운데보다는 떠날 수 있으면 떠나라, 는 책을 먼저 읽었는데, 언뜻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폐허 속에서 일어나는 그 모습에서 삶에 대한 강한 긍정, 욕구를 볼 수 있었고, 그리고 같은 저자인 것을 고려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 책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작이야 어찌 되었든 그렇게 읽게 된 이후, 시험 기간이면 어김없이 생의 한가운데를 읽었고, 그렇게 읽은 것이 5번도 넘는 것 같다.
루이제 린저, 생의 한가운데.
여러 번역본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전혜린의 번역 본을 좋은 것으로 말하지만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여러 번역본을 직접 읽어 보고 사는 것이 좋아 보인다.
니나 부슈만. 삶에 대한 강렬한 긍정을 갖고 열정적으로 사는 여자.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묘사된 그녀의 삶을 읽을 때마다 삶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솟아오른다는 것이 중요할 뿐. 자살 시도로 거의 죽음 직전에 간 자신을 병원으로 옮겨 준 이에게 무덤덤하게, "그 때 나를 살린 것은 바로 나에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혈액이 온 몸을 모두 휘돌고 있다 하더라도 살겠다는 의지와 욕망이 없다면 결코 산다고 할 수 없을테니, 정말 그 때 니나를 살려 준 것은 슈타인이 아니라 니나 그 자신일 것이다. 남자 주인공의 성격이 내 성격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이것저것 많이 따지기 때문에 결국은 쭈뼛거리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나만이 아닐테니 굳이 그와 나를 동일시하지는 않아도 좋을 듯 싶다. 이런저런 소설들을 읽으며 보아 오았던 사랑 이야기 중에 생의 한가운데에서만큼 생과 사랑이 얽히고 섥힌 것이 또 있나 싶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거나 폭풍의 언덕, 첫사랑, 인간의 굴레, 와 같은 것들은 결국은 사랑,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좀 심하게 얘기할 수도 있을텐데, 생의 한가운데는 좀 다르게 다가 온다. 비슷한 것으로는 A.J.크로닌의 성채 정도.
그래서, 젊은 날에 읽었던 생의 한가운데는 나에게 삶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갖게 해 주었는데, 그만큼 나는 세상에 대해 언제나 불만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어느 글에서 읽은 몇 줄의 인상 깊은 구절의 원출처였던, 시몬느 드 보봐르의 인간은 모두 죽는다. 죽지 않게 된 남자 훼스카의 몇 백 년에 걸친 이야기. 역설적으로 죽음이 삶을 가장 값지고 빛나게 해주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소설. 사랑하는 이들이 먼저 죽게 되는 것을 몇 번 경험한 훼스카는 사랑도 부질없음을 느끼고, 그리고 많은 것, 인생 사가 다 부질없음을 느끼고 그냥 멍하니 앉아 있는 훼스카.
그렇게, 이 두 책은 나에게 삶에 대한 양극단으로 다가오곤 한다. 삶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인간은 모두가 죽는다를 읽음으로 해서 벗어버릴 수 있었는데, 부작용으로 허무감이 들 때면 생의 한가운데를 읽어서 그래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그리고, 이런저런 생활 끝에 결국은 안착한 곳,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어느 날, 책장에 있던 삐에르 쌍쏘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무심코 꺼내 들어 몇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 때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간 나에게 무던히도 영향을 주었던 책이 바로 이 책이었구나'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안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 학문적 호기심 이외에는 대단하게 이루고 싶은 것도 없고, 크게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고, 명성을 얻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저 하루하루 조용히 보내면서, 주위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변화를 느끼며 조용히 살아가는 것. 많은 욕망들이 본질적으로 허무함을 깨닫게 된 바, 강렬히 원할수록 더욱 더 얽메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라리, 존재한다는 인식만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래도 육신을 갖고 이 세계에 살고 있으니 몸을 놀려 무엇인가를 해야 하고, 머리가 달려 있으니 생기는 호기심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삶에 강하게 얽메여 있다 할 수 없는 수많은 욕망들에게까지 얽메여 있을 필요는 없겠지. 그냥, 조용히 지는 해를 보며 하루를 평화롭게 지나 보내는 날들. 잠깐동안만이라도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쉴 수는 있는 분주할 수도 있는 나날들. 가끔은 게으름을 피워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 생활. 그리고, 그러한 날들 속에 조용히 스며드는 자연의 변화를 충분히 느낄 수 있어서 가끔은 자연의 변함없는 변화에 조금은 경외감을 느낄 수도 있는 날들.
앞으로 내 앞에 어떤 날들이 펼쳐질 것인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결국 평화롭게 묘사된 풍경의 어느 구석에 앉아 있는 내 모습으로 수렴할 것을 알기에, 그렇게 조용히 앉아 있는 내 모습. 그 모습은, 남들보다 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달음박질 치다가 어느 날 문득 이것은 무엇이고 왜 이러고 있는가를 느끼고 주저 앉아 뒤돌아 보며 회의하던 날들이 있었고(인간은 모두 죽는다, 로 인하여), 그래도 살아 보자, 라고 말하며 일어나 다시 앞으로 밀고 나아가던 날들이 있었고(생의 한가운데를 읽고), 그런 날들을 거쳐, 쉬고 싶을 때는 쉬고, 나아가고 싶을 때는 나아가고, 그리고 어느 순간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느꼈을 때는 미련 없이 그 곳에 잠드는 것을 바라게끔 되었기에(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읽고) 가능한 모습이겠지.
워낙에 공부라는 것을 열심히 하지 않는 편이기도 했고, 더구나 대학 들어가면 좀 달라질까 했던 수업방식을 비롯한 여러 교육체계가 기대했던 것과 너무 달라서 더더욱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할 무렵 그 책을 읽게 되었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내가 그 책을 읽게 되었는지 명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느 책의 가장 뒷면에 있는 몇 줄의 소개글이 발단이 되었던듯 싶다. 본교 쪽에 있는 중앙도서관까지 일부러 찾아 가서, 그 당시만 해도 폐가실로 운영되던 곳에 가서 신청용지에 책 제목을 적고 직원에게 건넌 후 얼마 있다 받은, 낡디낡은 책. 너무나 낡아서 이 책밖에 없느냐고 묻자 얼마 간 뒤에서 찾다 나오면서 유명한 책인데 왜 이것밖에 없는지 모르겠다며 그냥 보라고 한다. 그래서 읽게 되었다. 아, 생각해 보니 생의 한가운데보다는 떠날 수 있으면 떠나라, 는 책을 먼저 읽었는데, 언뜻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폐허 속에서 일어나는 그 모습에서 삶에 대한 강한 긍정, 욕구를 볼 수 있었고, 그리고 같은 저자인 것을 고려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 책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작이야 어찌 되었든 그렇게 읽게 된 이후, 시험 기간이면 어김없이 생의 한가운데를 읽었고, 그렇게 읽은 것이 5번도 넘는 것 같다.
루이제 린저, 생의 한가운데.
여러 번역본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전혜린의 번역 본을 좋은 것으로 말하지만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여러 번역본을 직접 읽어 보고 사는 것이 좋아 보인다.
니나 부슈만. 삶에 대한 강렬한 긍정을 갖고 열정적으로 사는 여자.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묘사된 그녀의 삶을 읽을 때마다 삶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솟아오른다는 것이 중요할 뿐. 자살 시도로 거의 죽음 직전에 간 자신을 병원으로 옮겨 준 이에게 무덤덤하게, "그 때 나를 살린 것은 바로 나에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혈액이 온 몸을 모두 휘돌고 있다 하더라도 살겠다는 의지와 욕망이 없다면 결코 산다고 할 수 없을테니, 정말 그 때 니나를 살려 준 것은 슈타인이 아니라 니나 그 자신일 것이다. 남자 주인공의 성격이 내 성격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이것저것 많이 따지기 때문에 결국은 쭈뼛거리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나만이 아닐테니 굳이 그와 나를 동일시하지는 않아도 좋을 듯 싶다. 이런저런 소설들을 읽으며 보아 오았던 사랑 이야기 중에 생의 한가운데에서만큼 생과 사랑이 얽히고 섥힌 것이 또 있나 싶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거나 폭풍의 언덕, 첫사랑, 인간의 굴레, 와 같은 것들은 결국은 사랑,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좀 심하게 얘기할 수도 있을텐데, 생의 한가운데는 좀 다르게 다가 온다. 비슷한 것으로는 A.J.크로닌의 성채 정도.
그래서, 젊은 날에 읽었던 생의 한가운데는 나에게 삶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갖게 해 주었는데, 그만큼 나는 세상에 대해 언제나 불만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어느 글에서 읽은 몇 줄의 인상 깊은 구절의 원출처였던, 시몬느 드 보봐르의 인간은 모두 죽는다. 죽지 않게 된 남자 훼스카의 몇 백 년에 걸친 이야기. 역설적으로 죽음이 삶을 가장 값지고 빛나게 해주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소설. 사랑하는 이들이 먼저 죽게 되는 것을 몇 번 경험한 훼스카는 사랑도 부질없음을 느끼고, 그리고 많은 것, 인생 사가 다 부질없음을 느끼고 그냥 멍하니 앉아 있는 훼스카.
그렇게, 이 두 책은 나에게 삶에 대한 양극단으로 다가오곤 한다. 삶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인간은 모두가 죽는다를 읽음으로 해서 벗어버릴 수 있었는데, 부작용으로 허무감이 들 때면 생의 한가운데를 읽어서 그래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그리고, 이런저런 생활 끝에 결국은 안착한 곳,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어느 날, 책장에 있던 삐에르 쌍쏘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무심코 꺼내 들어 몇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 때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간 나에게 무던히도 영향을 주었던 책이 바로 이 책이었구나'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안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 학문적 호기심 이외에는 대단하게 이루고 싶은 것도 없고, 크게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고, 명성을 얻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저 하루하루 조용히 보내면서, 주위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변화를 느끼며 조용히 살아가는 것. 많은 욕망들이 본질적으로 허무함을 깨닫게 된 바, 강렬히 원할수록 더욱 더 얽메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라리, 존재한다는 인식만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래도 육신을 갖고 이 세계에 살고 있으니 몸을 놀려 무엇인가를 해야 하고, 머리가 달려 있으니 생기는 호기심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삶에 강하게 얽메여 있다 할 수 없는 수많은 욕망들에게까지 얽메여 있을 필요는 없겠지. 그냥, 조용히 지는 해를 보며 하루를 평화롭게 지나 보내는 날들. 잠깐동안만이라도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쉴 수는 있는 분주할 수도 있는 나날들. 가끔은 게으름을 피워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 생활. 그리고, 그러한 날들 속에 조용히 스며드는 자연의 변화를 충분히 느낄 수 있어서 가끔은 자연의 변함없는 변화에 조금은 경외감을 느낄 수도 있는 날들.
앞으로 내 앞에 어떤 날들이 펼쳐질 것인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결국 평화롭게 묘사된 풍경의 어느 구석에 앉아 있는 내 모습으로 수렴할 것을 알기에, 그렇게 조용히 앉아 있는 내 모습. 그 모습은, 남들보다 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달음박질 치다가 어느 날 문득 이것은 무엇이고 왜 이러고 있는가를 느끼고 주저 앉아 뒤돌아 보며 회의하던 날들이 있었고(인간은 모두 죽는다, 로 인하여), 그래도 살아 보자, 라고 말하며 일어나 다시 앞으로 밀고 나아가던 날들이 있었고(생의 한가운데를 읽고), 그런 날들을 거쳐, 쉬고 싶을 때는 쉬고, 나아가고 싶을 때는 나아가고, 그리고 어느 순간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느꼈을 때는 미련 없이 그 곳에 잠드는 것을 바라게끔 되었기에(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읽고) 가능한 모습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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