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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영화

쇼펜하우어에 대하여

by adnoctum 2010. 12. 12.

 

   상식이 얼마나 잘못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두 가지 좋은 예가 있는데, 하나는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쇼펜하워가 염세주의자이고 자살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결코 그렇게 말을 한 적이 없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것은,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욕망에 휘둘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어차피 완벽하지 않으니까 막 살아버리자, 이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살아 보자, 완벽하지 않으니까 남의 실수도 좀 용서해 주자, 와 같은 체념적 순응이다. 어찌 보면 장 그르니에의 [[존재의 불행]]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장 그르니에가, 불교도들이 염세주의자가 아니듯 쇼펜하우어도 염세 주의자가 아니다.


   쇼펜하우어. 세상에 대한 다소 비관적 시각과는 달리 그는 일상 생활에서는 매우 위트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집이 어느 정도 유복했고, 귀족다운 분위기를 풍겼다고 한다. 또한 비록 죽을 때까지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몇 번의 로맨스도 있었다고 한다. 그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60대의 교수에게 보낸 글의 첫머리는 "인생은 고난이다"와 같은 문구였다고 한다. 이십대의 풋내기가 60대의 교수에게 어찌도 저런 맹랑한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쇼펜하워 인생론을 읽어 보면, 그렇게도 명확하게 핵심을 짚어 내는 능력에 한 번 놀라고, 그것을 글로 그렇게 잘 옮긴 것에 두 번 놀랄 것이다. 덧붙이자면, 곽복록님이 번역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으면, 탁월한 번역 능력에 또 한 번 놀랄 수 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난 이 책처럼 번역이 깔끔한 책을 여태껏 거의 못 보았다. 불어의 김화영 선생님의 번역 정도. 내용이 쉽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그것을 이토록 깔끔하게 옮긴 번역자의 능력은 정말 최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그나마 철학자 중 쇼펜하워(와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칸트는 너무 어렵다...)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생리학에 대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철학자들이 저지르는 실수를 조금 덜 하기 때문이다.


    비록 헤겔과의 대결(?)에서 참패하기는 했어도, 쇼펜하우어 말년에는 그의 철학이 다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중 니체가 가장 유명하고. 21세기 가장 독특한 철학자로 알려진 비트겐슈타인도,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으나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참고

쇼펜하우어 설명(한국어 위키, 영어 위키)

쇼펜하우어의 책: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교보 문고, 아마존

 - 원본 작성일 : 2007-08-14 21:57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  원본 작성일 : 2004-02-02 13:15

   대학교 2학년 때인 것으로 기억한다. 잠시 사회 생활을 하고 복학을 한 나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왜냐 하면, 순수과학을 하고 있는 나에게 피할 수 없는 의문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가?" 현상의 이면에 감추어진 '원인'을 찾고자 했던 나에게 과학이 던져주는 답에는 너무나 많은 헛점이 보였고, 따라서 나는 과학 자체의 답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친구의 추천으로 우연히 책 2권을 접하게 되었다. 신부님이 되려다 스님이 된 분의 책이었는데, 그 책에서 저자는 쇼펜하우어에 대해 경외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한 인간의 경외를 받을까 하는 호기심에 쇼펜하우어의 책을 몇 권 읽어 보았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준 것과 더불어,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의문에 대해 답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몇 권의 책을 읽은 후, 드디어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를 읽게 되었다. 이 책에는 여태까지 읽은 쇼펜하우어의 저서의 원전들이 있었다. 이 책으로 인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 더 정확히 말하면, 세상을 인식하는 인간의 방식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맥락에서의 과학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불가해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개념을 상정한 후, 그것을 이용하여 세상을 설명하는 것은, 어찌 보면, 성급한 근본주의로의 귀환처럼 보여서, 2번의 통독을 마친 지금에는 그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할 순 없으나, 그가 던져준 수많은 질문들이 나의 생각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그(쇼펜하우어)는 세상을, 세상이 있다고 '받아들이는' 주관과, 그 주관의 인지 대상이 되는 객관으로 구분한 후, 주관이 객관을 받아들이는 방식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주관의 관찰 대상이 되는 세계의 모습은 우리에게 현상이란 이름으로 알려지며, 인간 사유의 기본 전제인 '시간', '공간', '인과율'에 의해 주관(인간)은 외부 세계를 자신의 사고 체계 안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이 전제 조건들의 위에서 사고를 형성하기 때문에, 모든 현상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을 것을 전제하고 있다. 즉, 어떤 현상에는 그 현상을 일으킨 원인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인간 사유의 전제 조건이며, 이것이 과학의 성립 근거가 된다.

   변화는 하나의 객관은 시관과 공간의 교차점들 중, 유일하게 한 곳에밖에 존재할 수 없음을 가정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객관을 이루는 요소들의 공간상의 이동을 의미한다. 기억이라는 요소로 인해 순간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현재를, 과거와 미래로 확장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인간은 따라서 시간의 일직선 위에 존재하는 변화를 인지할 수 있으며, 인간 이성의 도움으로 인해 그 이면에서 그 변화를 일으킨 어떤 다른 그 무엇을 찾는다. 이것이 과학이다. 그러나 과학이 설명해 줄 수 있는 방법은, 인간의 사고가 받아들일 수 있는 체계 안으로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과학은 이미 인간에게 주어진 재료를 이용하여 현상을 설명해 줄 따름이다. 본서의 15장에서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다.

   지금까지는 나에게 과학을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해 준 부분이었다.

   그는 생명 현상 또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근원이라 주장한다. 생명 현상은 단지 '의지'의 발현으로, 시간이나 공간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체계 내에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지 또한 더이상의 이해는 불가능하며, 따라서 생명을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의지'의 발현인 '생명'이 존재하는 것은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으나, 그것이 무엇이고 왜 존재하는지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그렇게 물을 수 없는 것처럼, 물을 수 없다. 부록에서 보이듯이, 그는 생명현상을, 이성 능력을 갖춘 의지의 발현만으로 제한시킨다면, 의지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라고 한다. 의지가 발현되는 것은, 그것이 조합을 이루는 속성에 따라 단계가 나뉘어지고, 그 최상위 단계는, 이성과 의지의 결합인 인간이라는 것이다. 의지 그 자체만이 존재하는 것은 자연력, 즉 중력,같은 원초적인 힘들이고, 그 윗단계가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된 의지인 식물, 그 윗단계가 단세포 동물이며 그 윗단계로 갈수록, 살고자하는 의지에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 진 좀 도 세련된 '도구'들이 있을 뿐이며, 그 최상위 단계는 바로 이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성은 의지 그 자체, 즉 살고자 하는 것에서 떠날 수 있으며, 순수한 이성의 목적만을 추구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인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해탈의 의미를 정확히 규정하여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성을 통해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의지의 봉사자인 이성을 통해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 세계 그 자체가 의지 자체에 제대로 전달될 수 없다고 한다. 즉, 의지가 외부 세계와 소통하는 직접적인 통로인 직관을 통해 외부 세계를 받아들일 때에만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것을 정확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며, 그것이 바로 예술이라는 것이다. 본질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비교적 그것을 쉽게 느낄 수 있도록, 사물의 본질의 속성을 하나의 사물에 잘 모아 놓은 행위가 예술이며, 예술 행위를 봄으로써 비로소 사람들은 본질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천재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이렇게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괴테는 인간이 갖고 있는 근본적 속성들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기 때문에, 괴테의 작품에는 인간 고유의 속성이 살아 숨쉬는 것을 사람들은 쉽게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의 이면에 존재하는 그 본질, 그것은 이데아이며, 그 이데아의 최종 본질인 '물자체', 그 모든 것을 깨달은 사람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각 사물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며, 따라서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괴로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미망에 덮여 있는 사람은, 자신과 외부의 사물을 철저히 구분하며,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행위를 한다. 이것이 이기적 속성이며, 이것은 본질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일삼는 악이다.

   이 책에는 예술과 도덕에 대한 지금까지의 소재 이외에도 수학, 영웅, 천재 등 수많은 소재에 대한 그의 사고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주저를 읽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저서인 "Fourfold Roots of Sufficient Reason"을 먼저 읽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우리 나라에서 이 책은 번역이 되지 않았고, 수입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우선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먼저 읽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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