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17 22:58
합리화는 가치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형태로 나타나곤 한다. 즉, 나의 행동, 취향, 수준, 가치관, 생각 등이 나쁘지 않은 것은, 나의 가치관이 너와는 다르기 때문이고, 가치관에 대해서는 절대적 기준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나의 가치관에서 나온 나의 모든 것은 나쁘지 않다, 와 같은 형태.
위와 같은 합리화는 대표적으로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서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이제 막 형성되는 '자아'의 개념에 의한 많은 것들 - 개성과 같이 - 이 아직 보편성을 염두해두고 있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는 이와 같은 합리화가 자라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우리는 그것에 대해 관용을 유지해도 괜찮은 것 같다. 그러나, 20대가 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가치의 상대성을 근거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사람들은 창피해 해야 한다.
조악한 문화적 수준은, 그 중에서도, 위와 같은 합리화를 취하는 가장 간단한 예이다. 또한 암묵적으로, 사회적으로 횡행하는 잘못된 관습 역시 가치관의 상대성을 논거로 항상 합리화한다. 인권 문제에 있어 중국이 말하길, 중국은 서구 사회와는 다르기 때문에 서구 사회의 일방적 가치관으로 중국의 인권 문제를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처럼. 또는 한국 사회에서 '나이'를 기준으로 사람을 서열화하는 것과 같이 '인간'을 '서열화'하는 것이 전통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것같이.
물론 우리는 각 개인의 가치관을 중시해야 하고, 그에 따라 개성을 중시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몰개성이 판을 치는 한국 사회에서 그토록 상대적 가치관을 중시하는 것이 모순이라 생각한다. (좋은 참고글: 남의 눈 의식하는 한국 사람, 한국 패션.., 신발?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시죠?^^* )
이런 개성은 왜 시선집중을 받을까? 취향은 상대적이라며?위와 같은 합리화는 대표적으로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서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이제 막 형성되는 '자아'의 개념에 의한 많은 것들 - 개성과 같이 - 이 아직 보편성을 염두해두고 있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는 이와 같은 합리화가 자라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우리는 그것에 대해 관용을 유지해도 괜찮은 것 같다. 그러나, 20대가 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가치의 상대성을 근거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사람들은 창피해 해야 한다.
조악한 문화적 수준은, 그 중에서도, 위와 같은 합리화를 취하는 가장 간단한 예이다. 또한 암묵적으로, 사회적으로 횡행하는 잘못된 관습 역시 가치관의 상대성을 논거로 항상 합리화한다. 인권 문제에 있어 중국이 말하길, 중국은 서구 사회와는 다르기 때문에 서구 사회의 일방적 가치관으로 중국의 인권 문제를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처럼. 또는 한국 사회에서 '나이'를 기준으로 사람을 서열화하는 것과 같이 '인간'을 '서열화'하는 것이 전통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것같이.
물론 우리는 각 개인의 가치관을 중시해야 하고, 그에 따라 개성을 중시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몰개성이 판을 치는 한국 사회에서 그토록 상대적 가치관을 중시하는 것이 모순이라 생각한다. (좋은 참고글: 남의 눈 의식하는 한국 사람, 한국 패션.., 신발?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시죠?^^* )
우리는 개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그 개성이 보편성의 범주 밖으로 빠져 나가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물론 그 보편성이 어디까지냐, 하는 것이 종종 문제가 되지만 (동성연애 혹은 일본의, 성인이 된 딸과 아버지의 혼욕같은 것), 한국에서는 이미 보편성을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가치관의 상대성을 이유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단지 취향의 문제에 대하여 그것을 마치 잘못된 것처럼 대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왜 절대적 기준, 이라는 것이 중요할까? 그것은, 절대적 기준에 가까운 것일수록 보편적인 것이고, 보편적인 것일수록 보다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류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인'은 어느 문화에서든 나쁜 것으로 추구되고,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것은 좋은 것으로 추구되는 것처럼.
그렇다면 왜 삶에 있어 '기준'이라는 것이 필요할까? 그것은, 나쁜 행위를 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 조건이 '기준'이기 때문이다. 즉, '나쁜 행위'라는 것은 '기준'이 있기 때문에 나쁜 행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기준에 의거하여 나쁜 행위를 하지 않는 선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기준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일관된 기준'이라는 것이 없는 사람은 항상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게 된다. 가만히 관찰해 보라. 잘못을 저지르고도 스스로 잘못하고 있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쁜 행위'에 대한 일정한 판단 근거가 없다. 나는 이것이 많은 정치인들의 행위를 설명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식은 하고 있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 잘못했는지에 대한 인식조차 못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일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과거의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잘못'이라고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내 생각일 뿐이다.
또한 우리가 작금의 경찰과 검찰의 권력의 주구적 행태에 대해 분노하는 것 역시 그들이 강조하는 법의 집행에 있어 일관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일관된 기준이 없이 행해지는 모든 행위는 악행이다주1), 설령 법이라는 감투를 쓰고 진행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삶에 있어 '기준'이라는 것이 있어야 그것에 의해 나쁜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있고, 그 기준이라는 것이 일관성이 있어야만 자신의 행위를 그때그때 합리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준은 될수 있으면 '절대적 기준' 또는 '보편적 기준'으로 인식되는 것에서 너무 멀지 않아야 한다.
주1) 일관된 기준이 없다는 것은 곧 합리화를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합리화란,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 그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 당시 자신에게 유리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합리화란, 목적의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모든 수단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들이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논리는 결코 그들의 상대자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합리화란 자신의 치부를 덮기 위해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일 뿐이다. 일관성이 없다면 논리적일 수 없고, 나는 논리성으로 위장된 모든 비논리를 혐오한다. "합리화의 동음이의어는 '허튼소리'" - 오쇼 라즈니쉬, 배꼽에서.
- 미몹 백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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