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에게, 그리고 누군가에게.
내가 지금은 비록 거지처럼 가진 것 없고, 이룬 것 없고, 볼품 없이 사는 것에 대해 오히려 그것을 추구할 정도로 원하는 것이 거의 없는, '소유'라 추상화 할 수 있는 그 어느 행동이나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울지라도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이들이 이런저런 외부의 요인 때문에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억제시켜야 했던 중고등학교, 대학교 때,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그러한 많은 것들을 무시했었다. 나는 '진정으로 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것을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중요하다 생각되는 것들을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 가장 좋은 예가 돈과 연애일 것이다, 나와 그 이외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간극이 가장 큰 것이. 설령 그 중요성에 어느 정도 동의할지라도 결코 돈을 추구하지는 않기 때문에 몇 번 들어 온 제안도 거절을 했었다, 과외나 아르바이트같은 푼돈에 대한 제안이 아니다. 연애도, impulse function 처럼 가끔 미친듯이 나를 괴롭히기는 했었지만 그 이외의 기간에는 연애에, 거의도 아니고 전혀 관심이 없었다. 대신 별로 많지 않은 이들이 원할 것 같은, 그러한 것에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었다. 예를 들면, 앎이라는 지적 행위, 좀 더 넓게는 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래 봤자 혼자 지지고 볶고 한 것이 얼마나 깊이가 있겠냐만은 지금도 서점에 가면 여전히 과학철학이나 쇼펜하워/칸트/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근처에서 서성대고 있다. 바로 오늘만 해도 메를로 퐁티의 책을 들고 계산까지 하려다 다시 가져다 놓고 왔다. 왜 걸으면서 명상을 하느냐는 소리를 하는 동기, 제가 공부하는 거 보면 난 공부하면 안된다고 하던 동기, 아침 7시에 가도 새벽 2시에 가도 학과 도서관에 있어서 귀신인 줄 알았다는 후배들. 난 그 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학점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숙제도 해 놓고 귀찮아서 안 낸 적도 여러 번 있다, 알았으면 된 것이지 굳이 점수를 꼭 받아야 하나 란 생각이 들었거든. 고등학교 때도 성적이 아니라 과목 그 자체가 재미있어서 시험 범위하고는 상관없는 부분을 혼자 공부할 때도 많았다. 학부의 방학 때는 주로 프로그래밍을 하거나, 고등학교 때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물리를 공부하거나, 지난 학기 배운 재미나는 과목 - 가령 생화학 - 을 다시 공부하곤 했었다. 물론 교과서 이외의 책을 사서 여러 책을 동시에 보면서. 프로그래밍도, C++ 을 하면서 끊임없이 그 근본에 대한 물음이 생겨나서 결국은 ALU가 언급되는 설명을 보고 나서야 만족을 했었다.
그러니까, 내가 비록 뭐하는 놈인지 모르는 행동을 했을지라도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말 앞뒤 안가리고 미친듯이 달려 나갔었다. 단지 그러한 것이 돈이나 취직, 학점과 같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쉬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뿐.
결국 나는, 뭔가를 놓는다는 것,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조금은 미뤄두어야 하는 것,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는 것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못한 것이다. 나는 반드시, 정말로 반드시 이해해야만, 만들어 내야만, 이뤄야만 했고, 그러한 것을 위해 다른 많은 것들을 무시했던 것이다.
뭔가를 진정으로 원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 갖게 되는 커다란 실망. 나는 이룩한 것으로부터의 커다란 기쁨과 함께, 이루지 못한 것으로부터의 커다란 실망을 끊임없이 겪었다. 그리고 그 실망은 그토록 간절히 원했기에 상당히 컸다. 그리고, 그것은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지난 날 내가 그토록 불만으로 가득 차 사람들을 대하고, 세상을 대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원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그로부터 얻는 아픔도 커질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 이후, 차라리 모든 것을 버리면 그러한 아픔을 다시는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으로까지 생각이 나아갔다. 그래서, 예의 그, 아니면 말지, 의 태도로, 그 때부터 모든 것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록 서서히이기는 하지만 꽤 오랜동안 계속되어 왔고, 어느 정도 가속도가 붙어서 지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과연 이러한 태도를 앞으로도 더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결국, 실패가 무서워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 아니던가. 한쪽 극단에서의 어리석음이 다른 쪽으로 이동한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만약 이러한 태도를 서서히 거부한다면, 결국 무엇인가를 원하는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일텐데, 과연 그것은 나를 나로 남게 해 줄 수 있는가? 그런데, 이러한 태도가 어쩌면 다른 그 무엇보다도 더 나를 규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얻지 못한 것, 이루지 못한 것에 순응하는 태도를 배워 나가면서, 지금보다는 조금 더 뭔가를 소망하는 편이 나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엊그제,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 진 순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런 순응이 온 몸으로 느껴졌던 순간인 것 같다. 순간적으로, 내가 갖고 있던 커다란 걱정에서 자유로워지는 해방감이 온 몸을 감쌌는데, 그 바로 직전에 바로 그렇게 '순응'의 마음이 불연듯 떠 올랐던 기억. 차라리, 그렇게 실망에 순응할 줄 알면서 무엇인가를 소망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완전한 무소유보다는 조금 더 좋을지도, 나를 조금은 더 즐겁게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때때로 실망이 찾아올지라도 그것은 그렇게 찾아 왔던 만족감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겠지.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을 완전히 놓아버린 후 어떠한 커다란 기쁨을 느낀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실망이나 아쉬움을 느낀 적도 없었고. 안정된 마음이 유지되기는 했지만 개콘 보며 웃는 기쁨 그 이상의 기쁨을 느낀 적이 몇 년 동안 거의 없었고, 뭔가에 대해 기대를 한 적도 거의 없었다. 이것이 내가 때때로 매너리즘이나 생활에 지독한 무료함을 느끼는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가 뭔가를 소망하는 것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지난 몇 년간 서서히 나를 침투한 매너리즘과 무료함을 없앨 수 있다는 가능성과 약간의 기쁨들. 물론 때때로 실망도 할테지만 그것은 기쁨을 얻는 것에 대해 지불해야 하는 것. 그러니 실망할 줄도 알면서 뭔가를 소망해 보기.
이 정도로 생각을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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