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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

안주거리

by adnoctum 2010. 1. 4.


   웃고 끝나는 술자리보다도 더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이 안주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그 누구에 대해 뭐라 할 수 없다. 특히 그가 그 자리에 없을 때. 왜냐 하면, 그렇게 할 자격이 있을만큼 훌륭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타인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렸다, 다시 빛도 닿지 않는 깊은 바닷 속으로 밀어 넣었다, 다시 용암 속으로 넣었다, 하는 그, 쉽게 나오는 한마디한마디에서 나는, 깊은 호기심과 순수함으로 메뚜기를 분해하고 있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보게 된다. 어린 아이야 타인의 고통에 대해 생각할만큼이 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다 큰 어른들이 남들의 고통 따윈 아랑곳하지도 않고 너무나도 간단하게 남을 아프게 하는 모습을 보면, 인간에 대한 회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좀 더 멀어져 간다.

    여하튼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면 안된다. 그것이 예의다. 예의 없는 사람이 너무도 많고, 예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고, 예의가 없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그래서, 세상은, 더 잔인해져간다. 하지만, 자신이 휘두른 칼날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는 사람을 보면서 사람들은 말하지, 도대체 누가 이런 거냐고...


    간단히 예를 들면, 불특정 다수에 대한 범죄. 만약 100 명의 사람이 한 명에게 인간적으로 잘못 대우해 주었을 때, 그 100 명 각각 개인은 자신의 행위가 사소한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그것을 한 몸으로 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가 느끼는 고통은 각각의 사람이 행하면서 느낀 그 고통 이상이 된다는 사실. 하지만 사람들은 말한다, 뭐 겨우 그까짓 것 갖고 그러느냐고. 그렇게, 한 개인에겐 참을 수 없을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아닌 것이 되는, 잘못된 악순환이 반복되어 결국 그는, 자신이 받은 고통을 불특정 다수에게 같은만큼으로 돌려 준다. 문제는 이 때는 그 고통이 나뉘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뿐. 100명이 1씩 그에게 준 고통으로 그는 100의 고통을 입었다면, 그는 다시 100명 각각에게 100에 준하는 고통을 주는 악순환. 이렇게 불쌍한 악마가 탄생하는 것이다. '법'과 '정의', '도덕'의 이름으로 그 악마를 응징하지만, 악마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계속 남아 있기 때문에 불쌍한 악마는 몇 년에 한 번씩 계속적으로 나타난다.



   조금 다른 예지만 최민수씨 사건이 있다. tv에서 방송이 된 듯 한데, "최민수씨 사건 돌아보기" (아고라의 원글은 삭제되었음). 나는 궁금한 것이, 최민수씨를 욕하던 그 수많은 사람 중 과연 얼마나 되는 사람이 그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질 것인가, 하는 것이다. 뭐, 욕을 했던 개인들이야 별것 아니었겠지... 최민수씨 개인이 느낀 고통하고는, 슬프고도 불합리하게, 아무런 상관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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