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두 개체도 완전한 합일을 이루어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또한, 그 누구라 하더라도 그를
온전히 알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 역시 자명하다. 나는, 그리고 모든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결코 깰 수 없는
어떤 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에반게리온에서는 이것을 AT 필드라고 하였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느끼는 '고독' 혹은
'외로움'의 요인 중 가장 커다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두 개의 달걀을 결코 하나로 만들 수는 없지만, 그 두 개를 하나의 '바구니'에 담을 수는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겠지만, '우리'라 일컬어지는 바구니 안에서는 하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두 개체를 하나의 바구니 안에 담기게끔 묶어 주는 것이 어쩌면 미약하게나마 우리가 갖고 있는 '동질감' 또는 '공감'이라 불리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옛날을 생각해 본다. 구체적으로 앞/뒤에 어떤 말을 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서 타인과 교류하면서 살 것을 결심하였다"란 구절이 일기장에 쓰여지기 전을. 고등학교 때였으니까 아직은 다소 속물적 근성에 물들어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의 흐름이 저와 같은 결론으로 나를 이끌었는지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그 이후 다른 사람들과 조금씩 '교류'라는 것을 했던 것 같다.
또다른 생각이 난다. 아마도 저 구절이 쓰여진 시기와 엇비슷할 것 같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야간 자율학습을 하다가, 내가 화가 난 채 책상을 세게 치면서 다소 큰 목소리로 뭐라 욕 비슷한 것을 했던 것 같은데, 그것은 순전히 어떤 생각의 결과 때문에 한 것이었고 그 어떤 '타인'과의 일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 욕은 허공에 대고 했던 것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나를 쳐다 보았고, 나는 계속 화가 난 채로 있었다. 아마도 아이들에게서 보였던, 어떤 이기심, 그러니까 '타인'의 존재에 대한 무관심함 때문에 화가 났었던 것 같은데, 그것은 그들의 아주 작은, 직접적으로 나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어떤 행동 때문에 촉발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찌저찌 해서 세상에 대한 문을 열었지만, 그 이후 계속적으로 내가 부딪혔던 문제는 '이질감' 이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나와는 달랐다. 내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모두들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넘어서, 그것들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 같았다. 돈, 명예, 권력과 같은 것 따위들. 물론 고등학교 때에도, 학기가 끝나는 것을 기념해 반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던 중국어 시간에 "나는 염세주의에 빠져 있다. 어쩌구~~" 하는 말을 하기는 했어도, 대학을 들어가서만큼 부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나를 짜증나게 했다. 화가 나게 했다. 정확한 절차에 의해 진행되지 않는, '규범'이라 일컬어지는 것에서 멀어진 모든 행동과 그 행동을 하는 모든 이들이 증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와 같은 현실을 극도로 혐오하게 되었고, 그것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반감으로까지 확장되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에도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이 쓰레기를 "떨어뜨려면" 마치 세상의 모든 악에 대한 죄를 그에게 물어야만 할 것만큼 그를 증오했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화가 난 채 있었다. 비록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표정에 나타났기에, 친구는, "너는 표정이 항상 어둡기 때문에 다가가기 매우 힘들다"란 말을 했고, 다른 사람은 "너는 항상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다"라는 말을 했다.
이런 식으로 나는 철저하게 세상에서 멀어진 채, 온갖 추잡한 욕망을 뒤집어 쓰고 혼돈을 이루고 있는 이들과 나를 분리한다는 생각으로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이 세상의 많은 이들, 가령 부처나 니체,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이들은 나와 같은 태도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한계에 부딪혔고, 나는 인간 세계에서 철저하게 분리됨에 따라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 - 이것을 '우연'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 에 책 한 권을 읽게 되었고, 염세주의 철학자로 잘못 알려진 쇼펜하워를 읽게 되었다. 그 후 몇 권의 책을 읽었고,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길었던 학부 생활 - 난 수업을 5년을 들었고, 1년은 휴학을 했었기 때문에 1999년에 입학해서 2005년 2월에 졸업했는데 - 은 그런 '생각'을 하고, 세상과 나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모두 지나갔다.
그 시기 내가 갖게 된 결론은, 인간은 불완전 하다는 것, 그리고, 그 불완전함 속에서 살아갈 운명을 갖고 있는 한, 그 불완전함을 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전 글에 서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을 했지만, 그것은 결코 비극적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일정 정도 느낄 수밖에 없는 어떤 '거리감'은 인정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한 거리감을 갖고 있기에 '남의 아픔'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는 근본적 한계를 항상 염두해 둠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남을 아프게 하는 우를 범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나는 어떤 '사실'의 옳고 그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왜냐 하면, 그러한 것은 명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으로 아픔을 느끼는 사람은 좀처럼 없을 것이다. 1 + 1 = 2 라는 것 또는 내가 얼마 전 풀었던 이런 방정식의 해결책이 이 것이 라는 것 때문에 슬픈 사람은 없을 테니까. 오히려, 어떤 '가치'와 '감정'처럼 그것을 명확히 판단할 수 없는, 그래서 명확히 '무엇이다'라 단정지을 수 없는 것을 대함에 있어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냐 하면, 명확하지 않고 단정지을 수 없는 것 때문에 남을 아프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바람을 피운 옥소리는 너무나도 나쁜 사람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그가 잘못한 것이 '확실'해도 잘못을 꾸짖을 때 조심해야 하거늘, 불확실한 것을 가지고 남을 아프게 함에 있어, 잔인함까지 드러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여기서 옥소리를 편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확신하는 사실로 인해 아픔을 겪는 사람이 분명 있으니 조심하자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왜냐 하면, 우리는 서로가 '확신'하는 것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며, 다른 이의 확신을 무시하면 그는 아파하기 때문이다. 이 아픔이 때때로 분노로 표출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화를 내는 것은 잘못된 태도라고 말하면서 짐짓 고상한 척 하지만, 그것은 남의 아픔을 보듬을 줄 모르는 사람이 하는 짓이다.
나는,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이 개체로서 갖고 있는 한계로 인해 결코 합일을 이룰 수 없다 하더라도, 내부로 끊임없이 향하는 시선을 밖으로 돌려 '합일점'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한다면, 서로 다른 여러 개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어떤 것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 때에서야 비로소 '혼자'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애초부터 '내 안에서' 완전한 '하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 하면, 우리는 결코 깨지지 않는 '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벽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큰 틀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조금은 더 편안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ps1. 이 글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왜냐 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흠... 이 말에도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ps2. 너무나 교조적이 되어버린 이 글의 주장과는 언뜻 배치되는 것 같은 나의 많은, 사회에 대한 '비판'과 '불만' 가득한 글들은, '객관화'라 말할 수 있는 - 이것은 나 자신에게도 항상 적용되는 것인데 -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가 속한 집단에 대해서조차도 마치 다른 사람 얘기하는 것처럼 내뱉는 말들. 가끔씩은 이러한 타자화가 너무나도 심해서 사람들을 아프게 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러한 점에 있어서는 조심하려 한다. 하지만, 나는, 어떤 집단, 위 마지막 문단에서 언급한 '큰 틀' 안에서 서로에 대한 합리화를 통해 잘못에 무뎌지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에이, 그런 건 그냥 넘어 가도 되", 하는 것들. 많이 경험하며 나 역시 동조하는 많은 잘못들. 우리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동질감'을 느끼는 것일까? 어떤 체계 안에 있으면 항상 이런 것이 나를 짜증나게 한다. 규칙은 정해져 있고,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왠지 죄를 짓는 것 같은데, 현실적으로 지키기 어려운 규칙들. 단적으로 "회의비"라는 항목으로 나오는 돈들, '회의'비라며 왜 회식비로 쓰이는 것이며, 왜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일까?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보다 큰 범주 안에서는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두 개의 달걀을 결코 하나로 만들 수는 없지만, 그 두 개를 하나의 '바구니'에 담을 수는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겠지만, '우리'라 일컬어지는 바구니 안에서는 하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두 개체를 하나의 바구니 안에 담기게끔 묶어 주는 것이 어쩌면 미약하게나마 우리가 갖고 있는 '동질감' 또는 '공감'이라 불리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옛날을 생각해 본다. 구체적으로 앞/뒤에 어떤 말을 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서 타인과 교류하면서 살 것을 결심하였다"란 구절이 일기장에 쓰여지기 전을. 고등학교 때였으니까 아직은 다소 속물적 근성에 물들어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의 흐름이 저와 같은 결론으로 나를 이끌었는지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그 이후 다른 사람들과 조금씩 '교류'라는 것을 했던 것 같다.
또다른 생각이 난다. 아마도 저 구절이 쓰여진 시기와 엇비슷할 것 같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야간 자율학습을 하다가, 내가 화가 난 채 책상을 세게 치면서 다소 큰 목소리로 뭐라 욕 비슷한 것을 했던 것 같은데, 그것은 순전히 어떤 생각의 결과 때문에 한 것이었고 그 어떤 '타인'과의 일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 욕은 허공에 대고 했던 것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나를 쳐다 보았고, 나는 계속 화가 난 채로 있었다. 아마도 아이들에게서 보였던, 어떤 이기심, 그러니까 '타인'의 존재에 대한 무관심함 때문에 화가 났었던 것 같은데, 그것은 그들의 아주 작은, 직접적으로 나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어떤 행동 때문에 촉발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찌저찌 해서 세상에 대한 문을 열었지만, 그 이후 계속적으로 내가 부딪혔던 문제는 '이질감' 이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나와는 달랐다. 내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모두들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넘어서, 그것들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 같았다. 돈, 명예, 권력과 같은 것 따위들. 물론 고등학교 때에도, 학기가 끝나는 것을 기념해 반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던 중국어 시간에 "나는 염세주의에 빠져 있다. 어쩌구~~" 하는 말을 하기는 했어도, 대학을 들어가서만큼 부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나를 짜증나게 했다. 화가 나게 했다. 정확한 절차에 의해 진행되지 않는, '규범'이라 일컬어지는 것에서 멀어진 모든 행동과 그 행동을 하는 모든 이들이 증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와 같은 현실을 극도로 혐오하게 되었고, 그것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반감으로까지 확장되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에도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이 쓰레기를 "떨어뜨려면" 마치 세상의 모든 악에 대한 죄를 그에게 물어야만 할 것만큼 그를 증오했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화가 난 채 있었다. 비록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표정에 나타났기에, 친구는, "너는 표정이 항상 어둡기 때문에 다가가기 매우 힘들다"란 말을 했고, 다른 사람은 "너는 항상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다"라는 말을 했다.
이런 식으로 나는 철저하게 세상에서 멀어진 채, 온갖 추잡한 욕망을 뒤집어 쓰고 혼돈을 이루고 있는 이들과 나를 분리한다는 생각으로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이 세상의 많은 이들, 가령 부처나 니체,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이들은 나와 같은 태도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한계에 부딪혔고, 나는 인간 세계에서 철저하게 분리됨에 따라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 - 이것을 '우연'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 에 책 한 권을 읽게 되었고, 염세주의 철학자로 잘못 알려진 쇼펜하워를 읽게 되었다. 그 후 몇 권의 책을 읽었고,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길었던 학부 생활 - 난 수업을 5년을 들었고, 1년은 휴학을 했었기 때문에 1999년에 입학해서 2005년 2월에 졸업했는데 - 은 그런 '생각'을 하고, 세상과 나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모두 지나갔다.
그 시기 내가 갖게 된 결론은, 인간은 불완전 하다는 것, 그리고, 그 불완전함 속에서 살아갈 운명을 갖고 있는 한, 그 불완전함을 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전 글에 서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을 했지만, 그것은 결코 비극적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일정 정도 느낄 수밖에 없는 어떤 '거리감'은 인정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한 거리감을 갖고 있기에 '남의 아픔'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는 근본적 한계를 항상 염두해 둠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남을 아프게 하는 우를 범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나는 어떤 '사실'의 옳고 그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왜냐 하면, 그러한 것은 명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으로 아픔을 느끼는 사람은 좀처럼 없을 것이다. 1 + 1 = 2 라는 것 또는 내가 얼마 전 풀었던 이런 방정식의 해결책이 이 것이 라는 것 때문에 슬픈 사람은 없을 테니까. 오히려, 어떤 '가치'와 '감정'처럼 그것을 명확히 판단할 수 없는, 그래서 명확히 '무엇이다'라 단정지을 수 없는 것을 대함에 있어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냐 하면, 명확하지 않고 단정지을 수 없는 것 때문에 남을 아프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바람을 피운 옥소리는 너무나도 나쁜 사람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그가 잘못한 것이 '확실'해도 잘못을 꾸짖을 때 조심해야 하거늘, 불확실한 것을 가지고 남을 아프게 함에 있어, 잔인함까지 드러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여기서 옥소리를 편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확신하는 사실로 인해 아픔을 겪는 사람이 분명 있으니 조심하자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왜냐 하면, 우리는 서로가 '확신'하는 것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며, 다른 이의 확신을 무시하면 그는 아파하기 때문이다. 이 아픔이 때때로 분노로 표출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화를 내는 것은 잘못된 태도라고 말하면서 짐짓 고상한 척 하지만, 그것은 남의 아픔을 보듬을 줄 모르는 사람이 하는 짓이다.
나는,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이 개체로서 갖고 있는 한계로 인해 결코 합일을 이룰 수 없다 하더라도, 내부로 끊임없이 향하는 시선을 밖으로 돌려 '합일점'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한다면, 서로 다른 여러 개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어떤 것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 때에서야 비로소 '혼자'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애초부터 '내 안에서' 완전한 '하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 하면, 우리는 결코 깨지지 않는 '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벽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큰 틀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조금은 더 편안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ps1. 이 글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왜냐 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흠... 이 말에도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ps2. 너무나 교조적이 되어버린 이 글의 주장과는 언뜻 배치되는 것 같은 나의 많은, 사회에 대한 '비판'과 '불만' 가득한 글들은, '객관화'라 말할 수 있는 - 이것은 나 자신에게도 항상 적용되는 것인데 -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가 속한 집단에 대해서조차도 마치 다른 사람 얘기하는 것처럼 내뱉는 말들. 가끔씩은 이러한 타자화가 너무나도 심해서 사람들을 아프게 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러한 점에 있어서는 조심하려 한다. 하지만, 나는, 어떤 집단, 위 마지막 문단에서 언급한 '큰 틀' 안에서 서로에 대한 합리화를 통해 잘못에 무뎌지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에이, 그런 건 그냥 넘어 가도 되", 하는 것들. 많이 경험하며 나 역시 동조하는 많은 잘못들. 우리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동질감'을 느끼는 것일까? 어떤 체계 안에 있으면 항상 이런 것이 나를 짜증나게 한다. 규칙은 정해져 있고,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왠지 죄를 짓는 것 같은데, 현실적으로 지키기 어려운 규칙들. 단적으로 "회의비"라는 항목으로 나오는 돈들, '회의'비라며 왜 회식비로 쓰이는 것이며, 왜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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