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기억에 크게 가치를 두지는 않기 때문에 기억하는 것이 많지는 않은 편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인지,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때때로의 기억은 매우 선명히 남아 있는데, 연속된 긴 시간의 기억은 아니고 단편적으로 조각나 있다. 어떤 것은 내가 정말 그러한 경험을 했던 것인지조차 스스로 확신할 수 없기까지 하다. 이와 더불어, 휴가 기간이 아닐 때 불연듯 떠나는 여행은 바로 이러한 기억을 남기기에 적합하다. 휴가 기간이기에 으레 남들 다 가는 것처럼 나 역시 가야만 하는 절차에 따라 가는, 그런 휴가나 여행이 아니라, 계획되지 않고, 너무나도 일상적이던 어느 날 맞게 되는 휴가, 또는 일탈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휴가.
지난 여름, 다행히 그 때가 2014 총선이었기에 그 시기만큼은 기억이 나는데 위치가 어디였는지는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지 않는 일정. 지리산의 어느 곳이었고, 버스를 타고 꽤 오래 갔다가, 더이상 영업을 하지 않는 음식점 앞, 커다란 마당이 곧 버스의 종점이었기에 그 곳 평상에 앉아 한참을 쉬며 버스를 기다리다 타고 온 일. 그 전에, 그리고 그 후에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 단지 이 기억만이 남아 있다. 커다란 마당에는 큰 바위가 있었고, 그 바위 위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으며 그 밑에 종아리 정도 올 깊이의 연못이 있었다. 그 곳에서의 한두시간의 휴식. 이 기억과 맞물린 몇 가지의 기억들은 '추억'이란 이름으로 불리면 족할 것 같은데 이 기억만은 그것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대학교 2학년 때였을까. 2000년이었을텐데, 그 때도 역시나 지리산이었다. 어느 곳인지도 모르겠고, 꽤나 더운 여름 날 버스를 타고 어느 곳까지 간 후,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들어 오는 어느 곳에 내린 후 등산을 시작. 한참을 가다 어느 폭포에서 쉬던 기억. 그 때 일군의 대학생 무리들. 한참 등산을 하던 와중 받았던 "밥먹자"는 문자. 학교 수업을 빼먹고 군대가기 위해 휴학을 한 친구와 함께 떠났던 여정.
제작년에 떠났던 일본. 아무런 계획도 없이 떠난 열흘이었기에 어찌 보면 다소 비효율적으로 보낸 것 같은 날일지도 모르겠지만, 너무나도 평범한 곳을 거닐던 기억은 굳이 특별하지 않아도 기억에 남곤 하는 다른 기억과 같게 기억에 남아 있다. 비 오는 어느 날 걸었던 거리. 떨어 진 벚꽃. 우중충한 날씨와 고양이. 매우 춥던 산책길. 햇살 가득하던 교토의 거리. 다소 쌀쌀했던 오사카. 그런 기억들.
결국은 불완전한 기억에 의해 지속적으로 변형이 생길 추억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이 차가워 지며 겨울이 오거나 매우 맑고 쾌청한 아침이거나, 오늘처럼 을씨년스런 저녁 가로등 불빛을 지나칠 때면 그 기억들은 무작위로 떠올라 나를 조금은 감상에 젖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