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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세상바라보기

소의 그 커다란 눈을 보았는가?

by adnoctum 2011. 2. 13.

   그 커다란 눈을 껌뻑거리면서 쳐다 볼 때는 왠지 모를 교감이 느껴진다. 많은 이들이 보았다는 워낭소리. 아마도, 그 주인공 할아버지와 영화로만 그것을 본 사람들 중간쯤에 내가 위치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작두로 짚을 10cm 정도씩 자른 후, 왕겨(벼껍질)을 갈아 만든 것 같은 사료와 함께 가마솥에 넣고 쇠죽을 끓인 후, 통에 담아 구유(소 밥그릇)에 담아 주면 콧김을 불면서 먹는 모습. 가끔은 별 이유 없이 소 옆에 서서 소랑 장난을 치기도 한다. 눈을 들여다 보다 인중을 손으로 만져 보기도 하고. 어렸을 때는 커다란 소 옆에 서는 것이 조금은 무서워서 외양간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옆에서 뿔을 한 번 잡아 당겨 보기도 하고, 하는 등 소랑 놀기도 했었다. 경운기가 아직 많이 사용되지 않을 때, 혹은 경운기를 부리기 어려운 곳을 갈아야 할 때는 내가 소를 몰고 가기도 했었다. 워, 이랴, 등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몇 가지 단어들과 함께 꽤 먼 길을 같이 걸어가기도 했었지.

   초등학교에서 집까지는 대략 4km 정도 되는데, 걸어 가다 보면 가끔은 동네 할아버지가 마차를 타고 오신다. 성큼성큼 걷는 소. 마차 뒤에 타서 소가 걷는 모습을 보면 어린 나이에도 힘겹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턱, 턱, 하는 소 발걸음 소리와, 마차의 어느 부분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곤 하며, 마차도 그 소리에 맞춰 들썩거리고.

   자식처럼 기른 소를 결국은 팔아서 돈을 마련해야 한다지만, 우리가 항상 종국의 어느 시점을 목표로 한다고 해도 그 과정까지 그것을 위한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우리가 죽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소를 기르며 소와 함께 하는 생활들이 그 녀석을 팔아 수중에 쥐여 질 얼마만을 생각한다고 할 수는 없다.

   예술 작품을 만드는 사람도, 연구를 하는 사람도, 재배를 하는 사람도, 프로그래밍을 하는 사람도, 모두가 그것이 결과적으로 주게 될 어떤 '돈' 보다 더 큰 의미를 찾고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을 '돈'으로 매우 협소하게 생각하는 환경에 있기 때문에 별로 생각을 할 수 없을 뿐. 아마도 많은 이들이 알게 모르게 '돈'이라는 것이 아닌 그 무엇을 위해 하는 작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남들에게 말하기 창피할지도 모르는.

   지금 그렇게 길러진 소와 돼지가 셀 수도 없이 많이 살아 있는 채로 땅에 묻혔다. 정부는 숨길 것은 숨기고, 감출 것은 감추다 워낙 많이 죽으니 며칠 만에 모여서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 위한 대책회의 끝에 "철저하게 대처한다"는 하나마나한 얘기를 하고 말았다. 미쳐버린 언론은, 밖에서 총알이 날라다니고 있는데도 여전히 평화롭다고 외치던 지난 날, 또는 당장 내일 외환위기가 터질 것인데도 끄떡 없다고 외치던 몇 년 전처럼 여전히 헛소리를 하고 있다. 대체 지금의 이 사태에 대해 제대로 된 기사를 제공하는 언론사를 찾아 볼 수가 없고, 단지 밑에서 그 커다란 소의 눈을 보면서 땅에 파 묻어야 하는 공무원들을 비판만 할 뿐이다. 비겁하고 비열한 짓이다.

   어미 닭이 알을 품으면 10개, 20개씩 품게 되는데, 부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르게 부화된 병아리 몇 마리는 일단 방에서 기르곤 한다. 언젠가는 tv를 보고 있었나, 그런데 병아리가 엄청나게 크게 삐약거린다. 왜 그런고 보니, 반지름이 길어야 5cm, 높이가 채 1cm 도 되지 않는 작은 접시 안의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털은 모두 몸에 달라 붙어 있는데, 몸이 정말로 작다. 닭걀 노른자 만하다. 털이 보송보송해서 몰랐는데, 실제 병아리 몸은 정말 작았다. 어찌나 불쌍하던지 두 손으로 감싸서 가만히 잡고 있었다. 드라이기로 말려 주자니 너무 작아 화상을 입을 것 같았고, 수건으로 덮어 주자니 수건 무게에 짖눌려버릴것만 같았다. 그러고 한 10분 정도 있으니 다시 털이 보송보송 해져서 귀여운 모습을 되찾았고, 삐약거리는 소리는 작아 졌다.

   꽤 시간이 흐른 후 집에 갔을 때, 이미 중닭이 되어 있는 그 녀석이 밖에서 제 혼자 먹을 것을 찾아 다니며 땅 여기저기를 부리로 찍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대견하던지.

   우리는 "개" 나 "고양이", 닭 과 같이 내가 먹는 동물에 대해 갖는 애착에 다소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그 개"는 나와 함께 한 추억이 많을 때, 그 개는 다른 여느 개보다도 나에게 더 각별하게 다가 온다. 다른 많은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매일 걷던 어느 길도 가슴 설레이게 하는 누군가랑 같이 걷게 되면 특별해 지는 것처럼, 누군가와 함께 한 시간은 그를 다른 것들보다 더 각별하게 만들어 준다. 그가 특별히 뛰어나거나 훌륭해서가 아니라 함께 했던 시간과 경험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에게도 해당된다. 심지어 dc의 식물갤에는 "이거 잡초인가요? 며칠 전부터 기르고 있는데...", "기르기 시작한 이상 잡초가 아닙니다." 란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누군가는 식물에게도 이러함을 느낀다.

   그런 동물들을 땅에 묻어야 하는 농민들. 그리고 비록 그렇게까지는 아닐지라도 그러한 고통을 바로 곁에서 보아야만 하는 말단 공무원들.

   소의 그 커다란 눈을 보았는가? 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소를 메몰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정신적 고통을.




   무슨 자판 연습을 하면서 본 글 같은데, 아파 죽겠어서 찾아간 병원. 한 의사가 병을 고쳐 준다. 어떻게 그렇게 잘 고치느냐고, 의사 선생님 형제분들도 다 의사라던데 선생님이 제일 잘 고치는 것 같다고 하자,

"아닙니다. 저희 형은 환자가 자신의 아픔을 조금 느끼기 시작할 때 손을 쓰지요. 그래서 환자는 저희 형이 별로 아프지 않은 병을 고쳐 줬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형은, 그러나, 환자가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기도 전에 미리 손을 써 주지요. 그래서 환자들은 첫째 형이 자신의 병을 고쳐 주었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환자가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고 말을 해줘야 그제서야 병을 고칠 수 있을 뿐입니다."

   김대중 정권에서도 구제역이 발발했었지. 그러나 매우 철저한 관리 속에 초기 진압이 성공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김대중 정권 때 구제역을 얼마나 잘 관리했는지조차 잘 모르지. 왜냐 하면 이미 커지기 전에 진압해 버렸으니까.

   물론 이번 구제역이 정말 심각하게 발발한 것일 수도 있는데, 며칠 만에 모여 한 회의가 "철저한 방역"같은 하나마나한 얘기인 것, 얼마 전 했던 발표를 완전히 똑같이 한 것 등으로 미뤄 봐서 초동 대처 + 그 후속 대처 모두가 미흡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












원본 작성일 : 2011-02-1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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