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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_생각

공각기동대

by adnoctum 2010. 8. 8.
2009-05-19 23:31


   만약 말초기관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자극을 정확히 모사하여 뇌로 전해주는 장치가 개발된다면, 인간은 과연 '신체'를 필요로 하는가? 다시 말해, 결국 '감각'이란 최말단의 감각기관으로부터 발생한 물리적 자극이 뉴런을 통해 전기신호로 바뀐 후 그것이 뇌까지 전달된 것. 만약 그 신호가 충분히 강하다면 인간은 '느꼈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고, 그렇지 않다면 그냥 무시한다, 다시 말해, 발생한 모든 물리적 자극이 인간에 의해 처리되지는 않는다. 또한, 물리적 자극의 적당한 처리를 위해서는 언제나 '의지'라 일컬어지는 그 무엇의 작용이 필요하게 된다. 어느 곳을 응시할 때, 수많은 자극이 눈으로 전해지지만 오직 응시하는 곳만을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inattentional blindness라 하여, 농구를 보고 있을 때는 도중에 곰돌이가 지나가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느 TV 프로에서의 실험에서처럼.

   그렇다면 왜 자극이 필요한가? 그것은, 인간이 '몸'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그러한 물리적 형태를 유지하면서 살아 나가기 위해서는 동일한 형태, 즉 주위를 둘러 싸고 있는, 다른 물리적 형태를 취하는 것에 대한 적당한 정보를 바탕으로 신체를 유지하기 위한 적절한 행동을 취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외부 환경을 제대로 감지할 수 있어야만 그 자극으로부터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어떠한 행동을 할 것인지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초음파'로부터 큰 상해를 입는 물리적 기관을 갖고 있었다면 초음파를 탐지할 수 있는 기관을 필요로 했을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인간이 갖고 있는 감각기관은 결국 인간의 물리적 형태, 즉 '신체body'라는 물리적 기관을 무리 없이 유지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만약 굳이 인간의 감각기관이 아니라 기계의 힘을 빌어 외부의 물리적 자극을 정확히 감지할 수 있게 되고, 그 자극이 뇌에서 '판단'에 필요한 정보의 근거가 될 수만 있다면, 왜 '신체'라는 일회성 기관이 필요해지는 것일까? 그리고 만약 그러한 물리적 자극 센서를 '인식기관'의 하위체계, 즉 외부 환경을 정확히 판단하는 도구로 쓸 수 있게 된다면 신체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과연 그러한 말초적 기관으로부터 발생한 자극에 의미를 두는 것은 유의미한가? 쉽게 모사될 수 있는, 얻을 수 있는, 소비될 수 있는 것은 가치가 떨어진다.

(스포일러 있음)



공안 9과.


쿠사나기 모토코.



   그렇다면, 그러한 물리적 자극을 감지하는 기관으로서의 인간을 배제하면,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자동문에 붙어 있는 센서와, 압력을 감지하는 터치 스크린과 마이크 등 인간의 감각기관을 모사하는 기계들을 모아 놓는다고 인간이 되지는 않는다. Ghost in the Shell. 결국 공각기동대의 감독도 인간의 신체라는 물리적 기관은 단순한 '껍데기'에 불과하고 그 안에 '고스트'라 하는 그 무엇이 있을 때만 '인간'이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것은 에반게리온에서 수많은 모조품 중 유일하게 레이만이 '영혼'을 갖는 개체로 발생한 것과 같은 일. 또 하나 중요한 것은, Ghost, 즉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중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타치코마가 갖고 있는 '개성'이라는 것. 즉, '나'와 다른 개체를 구별할 수 있는가? 이것은 영화 "I, Robot"에 나오는 대사, 즉, "여기 외부에서 무단으로 들어온 로봇이 하나 있다. 대답하라, 누구인가?"에 대해 자아를 갖지 않은 로봇들이 "One of us. 우리들 중 하나"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는 것과 상통한다. 즉, '자아'를 갖지 않으면 정확히 하나의 개체를 하나로 인식할 수 없고, 하나를 꼭 집어 지적할 수 없다. 즉, '특정specify'할 수 없다. 그래서 I, Robot 에서의 로봇들은 specify 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억'의 병렬화를 통해 경험까지 모두 공유하게 되었을 때, 타치코마 A 를 타치코마 B 와 구분시킬 수 있는 것은 사라지며, 그럴 때는 그러한 구분조차 무의미해진다. 하지만 바토의 전용 타치코마가 있는 것에서부터 그들이 점점 개성을 획득할 것을 기대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Stand Alone Complex - GIG 의 마지막에서 타치코마들이 쿠사나기 모토코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고 독자적 판단을 내린 것, 바로 이것이 타치코마들이 '개성' 즉 ghost 를 갖는 개체로 발전했음을 말해주는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다. ghost - 그것을 영혼, 브라흐만, 의지, 물자체, 도, 하여튼 뭐라 부르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그 무엇* - 를 갖지 않는 개체는 언제나 명령에 복종하며 살 뿐이다. 거부할 수 있고, 독자적 판단을 내리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을 때에만이 ghost를 갖는 개체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럴 때에만이 온전한 '개체'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어 제목 Ghost in the Shell - Stand Alone Complex 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조직의 '효율성'을 위해 철저한 명령 체계에 의해 움직이는 공안 9과의 8명. 그러나 그들에게 팀 플레이란 결코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독자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조직이다. 왜냐 하면, 비록 그들 대부분이 의체화되어 있지만 그들은 모두 ghost 를 갖고 있고, ghost 를 갖고 있는 개체는 스스로 독립하여 행동할 수 있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 사이에 팀 플레이라는 형편 좋은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스탠드 플레이의 결과로 얻어지는 팀워크 뿐이다" - 26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조직의 형태가 아닌가 한다.




공안 9과의 리더 쿠사나기 모토코. TV 시리즈에서는 꽤나 예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나온다. 바로 이 부분도 재미있는데, 쿠사나기 모토코는 키 168cm에 몸매도 좋고 얼굴도 예쁘고, 머리도 좋고, 상황파악 능력도 뛰어나며, 전투의 천재로, 매우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완전 의체로, 뇌를 제외하고는 모두 만들어진 것. 따라서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육체적 매력은 모두 '가짜'라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의체는 언제라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처럼.


이 안에, 모토코 있다. (Innocence에서)

그런 면에서 보자면, 현재의 인간은 외모를 바꾸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니까 외모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무의미하지는 않은 것 같다. 쉽게 바꿀 수 있다면 별로 의미가 없고 '개성'이 될 수 없을텐데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성형수술이 너도나도 하는 수술이 된다면 '얼굴'이 개성이 되는 시대는 사라지겠지. 의도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Innocence 편의 저 모습에서 모토코는 말한다, "이런 모습이라 미안하네"라고. 흠...




공각기동대 내용 그 자체로 보자면 정치적/국제적 이해 관계, 기업의 비리 등이 매우 복잡하게 얽히기 때문에 에반게리온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인간의 인식/의식/자아 등의 심리적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에반게리온에서보다는 조금 비중이 낮다. 단지 인공지능에 개성이 점점 부여되는 타치코마들간의 대화에서 이런 것이 조금 많이 나올 뿐. 하지만 과학적 상상력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공각기동대가 에반게리온보다는 조금 더 위인듯. 아주 오래 전(한 1995년 정도)에 한 맨티스라는 외화에서 처음으로 '형태'를 갖지 않고 존재하는 '의식'을 보았고, 은하철도 999 에서도 의식을 갖는 생명체가 일정한 형태가 없이(amorphous) 존재하는 행성에 간 철이의 모험담이 나오는 편에서 '형태'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부질없다는 얘기가 나오기 때문에 network 상에 '정보'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생명'이라는 개념이 크게 신선하게 와 닿지는 않았지만, 인간이 '생명'이라 규정하는 것 역시 결국은 '정보 전달'을 핵심으로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정보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인형사가 정치적 망명을 요구하는 대목은 매우 흥미롭다.


ps. 그 이외에도 생각해 볼 것이 많지만 우선은 이 정도로 끝내고 나머지 것들은 기약없이 미룬다. 언젠가 생각이 나면 또 쓰게 되겠지. 이 글을 쓰고 건물 밖으로 나오려, 어두 컴컴한 넓은 로비를 걸어 나오는데 자동문 닫히는 소리가 난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뭔가 하고 가만히 보았더니 자동문이 고장이 나서 혼자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 물론 '도'나 브라흐만과 '개성'/인격/영혼을 같은 층위에 놓는 것은 언뜻 이상해 보인다. 하지만, '생명'에서부터 탄생한 인간의 인식 또한 자연의 근본적 질서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미몹 백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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