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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

이질감

by adnoctum 2012. 11. 30.



   사람사 천치만치 고만치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지만, 아직 난 고만치까지 가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생각해 보면 고만치인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내가 느끼는 이 심리상태를 누군가에게 설명해 준다고 했을 때, 내 주변 상황에 대한 설명은 내 상태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는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 하면, 나는, 주어진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심리상태를 갖는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내가 걱정을 많이 할 것 같은 상황에서 난 별로 걱정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역으로, 일반적으로 봤을 때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거나 잘 알려진 해결책이 존재하는 경우에 내가 겪는 심리적 부담은 남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것과 다를 때가 많다. 아주 사소한 것 때문에 꽤나 괴로워 할 때가 있곤 한데, 그 때 그 모든 것을 말해 준다 해도 나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온전히 전달하기 힘들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 사이에선 간극이 생긴다. 긴 넉두리 끝에 그 간극이 조금은 메워지는 것을 경험 해 보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은 그 누구도 혼자라는 생각이 나를 항상 힘들게 한다. 물론, 내재된 한계를 인정하고 채념적 긍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알고 있고 지향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것 뿐이다. 


   워낙에 독특한, 괴상한, 흔치 않은 생각을 하며 살아 가고, 그런만큼 가치관이 남들과 많이 다르며, 그래서, 내 상황에 대한 전반적 사실을 충분히 묘사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부터 내가 받는 심리적 압박은 좀체 전달되지 않는 것 같다. 속 깊은 얘기를 좋아하기에 많은 이들과 그렇게 하곤 하는데, 두서너 시간을 넘는 오랜 기간 동안의 대화는 결국 날 좀 이해해 달라는 것으로 수렴하게 된다. 맞다, 이 글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 한계를, 벽을, 결코 넘을 수 없는 선을 자주 경험한다. 물론 우리가 살아 감에 있어 누군가에게 완전히 이해를 받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든 일이고, 단지 약간의 위안을 얻는 것이 우리의 태생적 한계라고는 하지만,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멀어지는 나를 보면서, 이제 됐으니 그만 하자, 라는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 그래, 내가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느낀 많은 이질감, 동떨어짐, 그리고 그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 감정 부스레기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가끔씩 상황이 나를 그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게 할 때가 되면, 결국에는 어딘가로 떠나 현실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지난한 노력 끝에 어쩔 수 없이 눈앞의 현실을 목메이면서 넘길 뿐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돌아 온다. 


   그래, 따지고 보면 누구나 남에게 말 못할 비밀을 갖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존재론적 인식이 실존적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크게 위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굳이 ,'남 일'이기 때문이라고 야속하게 말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그저 약간의 공감과 내 처지에 대한 위로섞인 몇 마디의 말 정도일 테니까. 그게 서로 다른 욕망을 갖고 개별적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갖는 한계일테니까. 


   지금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받아들여야만 할 때, 나는 새삼스럽게 나의 이상적 성향으로부터 오는 이 괴로움을 직시하곤 한다. 어쩌면 이상을 갖고, 비현실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가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은 이상과 현실의 실제적 괴리라기보다는 이상을 좇기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상을 위해 버려야 하는 현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애초에 둘이 같이 간다면, 그 괴리가 적다면 어느 한 쪽을 추구하는 것이 그리 큰 고민을 불러 일으키지 않겠지만, 그것은 결과론적인 것이고, 출발점에서 보자면, 이상이란 결국 현실적으로 힘든 것이기에 시작부터 이러한 문제가 내재되어 있던 것이다. 이 땅에 발딛고 서서 한걸음하걸음 걸어 나아갈 때마다 하늘로 날아 오르지 못했다는 그 사실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눈 앞에 있는 저 공중낙원을 가기 위해 나의 두 발을 땅에서 뗄 수밖에 없다는 그 사실. 많은 이들이 결국, 비록 안주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상을 살아 가면서 경험한 것을 적절히 숙성시켜 지혜로 만들어서 그 안에 머무르는데, 그러한 모습이 나같은 이상주의자에게는 '현실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누구나가 자신만의 울타리 속에서 저마다의 안식처를 마련하고 살아가고 있을 때, 안주할 곳 없이 날아다닐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기댈 곳 없다는 사실이 다시금 울타리 안으로 들어 가게 만든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겪는 문제란 결국 울타리 밖으로 나와서 아주 살짝 부는 바람에 흔들리면서 느끼는 불안감일지도 모른다. 어딘가로 날아 가 한 때 잠시 머무를 수 있는 곳을 찾는다 하더라도 결국 바람을 막아 주는 울타리의 부재는 나를 또 어딘가로 날아가게 만들겠지. 그 때, 잠시간의 휴식을 가졌던 곳에서 보았던 귀엽고 예쁘장한 꽃 한 송이에서 멀어진다 하여 괴로워 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 꽃을 보기 위해 그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정착을 할 때, 나는 비록 멀어지는 꽃향기가 그리울지라도 결국 울타리를 치지 않고 또다시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목적지도, 목적도 알 수 없는, 앞 날을 내다 볼 수 없는, 그 불안한 여행을. 


   언젠가, 현실적 욕망에 대한 긍정적 시선을 갖고자 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것은 나에게 어려운 문제이다. 현실감각이 부족하기 때문일수도 있겠지만, 선택의 문제이다. 요 며칠 간 자주 머릿 속에 멤돌던 노래 가사, 내가 가는 길이 힘들고 머~얼지라도 그대 함께 한다면 좋겠네. 이 여행의 동반자가 드물다는 것도 그렇고, 이런 여행을 떠나는 이가 드물다는 것도 그렇고, 이런 여행을 동경하는 이가 드물다는 것도, 모두, 나에게 이질감을 불러 일으킨다. 불확실함이 야수의 모습을 하고 어슬렁거리는 밖으로 나가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낙원에 도착한다 하여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할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면 예의 그 방랑벽으로 다시금 발걸음을 떼고 험난한 길을 스스로 걸어가려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취향의 문제니까 우월이라거나 핀잔이라거나 비판 또는 비난받을 일은 아니고,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에 공감의 문제일 게다. 차라리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인 것이라면 옳고 그름의 경계를 어느 정도 마련할 수도 있으련만, 그렇지 않은 문제이기에 더 힘든 것이다. "이해시킨다" 라는 말은 있어도 "공감시킨다"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 않으니까. 


   그러면, 나는 결국 이런 문제에 대해 누군가의 공감을 얻고 싶은 것일까? 아님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말을 하고 싶다면야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많지만,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과연 얼마나 공감할 것인가, 하는 것일테니, 내가 겪는 문제는 일차적으로 이상을 좇기 위해 버려야 하는 현실에 대한 괴로움일테고, 두 번째가 이러한 것에 있어 그 누군가와 공감하기 힘들다는 것일게다. 공감이라면... 뚜렷한 해결책이 없는 것이고, 현실을 놓는 문제 역시 그러해서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렇게 얼마 간 괴로워하며 계속 나의 갈 길을 가는 것 뿐이다, 지금은. 언젠가 좀 더 좋은 해결책을 알게 된다면 다행이겠다는 희망을 간직한 채. 



(음... 괜히 감상에 젖고 말았네... 역시 이상을 추구하기란 쉽지 않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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