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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

꾸준한 노력

by adnoctum 2010. 11. 21.


   어느 정도 자란 이후 우리에게 의미있는 말들은 이미 모두 한 번은 들어 본 것들이다. 결국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은 유치원 때 모두 배웠다는 말은 그리 틀린 말도 아닌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하나는 그렇게 뻔한 말들이 계속적으로 회자된다는 것은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렇게 중요한 것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중요하다고 알려진 많은 것들의 변주곡을 수도 없이 듣거나 읽게 됨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보편적 진리를 우리의 삶 속에 제대로 녹여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각주:1].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 중요한 것임을 자각함과 동시에, 비록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더라도 결국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는 믿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이럴 때 주위의 누군가의 끊임없는 격려가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인내이다.

   왜 나의 발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까? 나는 과연 발전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은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을 계속 의심하게 한다. 그런데,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 일주일 전의 나와 오늘의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1년 전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관건은 그것이다. 1년 전의 나, 6개월 전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한다면 분명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1년, 6개월 전의 자신의 모습을 좀처럼 뒤돌아 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뒤돌아 보는(retrospective ) 태도는 단순히 과거를 재음미한다는 것을 넘어서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를 결정해 주는 역할, 즉, 전향적(prospective) 태도를 갖게 해준다. 전혀 변화가 없는줄 알았는데 이만큼 발전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자신에 대한 믿음. 이와 같은 자신에 대한 신뢰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각주:2].

   지난 금요일에 암학회를 다녀 왔다. 뭔가 새로운 사실을 배우러 간다기보다는 요즘 좀처럼 잘 안 풀리고 있는 문제로부터 조금은 멀리 떨어져 머리를 식힐 겸 가게 되었다. 한 강연을 듣는데, 암세포에서의 대사작용에 관한 이야기였다. 암세포는 생장의 증가와 더불어, 세포구성성분이 되는 지질이나 단백질등을 계속적으로 만들어 내어야 하기 때문에 대사가 증가한다는 내용. 특히 암세포는 TCA를 끝까지 돌려서 oxidative phosphorylation 을 통한 에너지 경로보다는 lactic acid 쪽으로 돌린다는 내용. 사실 이런 내용은 꽤나 자주 이야기되었던 것인데, 세포의 구성물질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별로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강연을 들으면서 커다란 그림이 쫙 그려졌다. 왜 GLUT 계열의 glucose transporter 들의 발현이 암세포에서 증가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다른 것과 연관되는가. 그런데 이 내용은 생화학 책 1 권을 통독해야 비로소 그릴 수 있는 내용이 된다. 다른 책은 잘 모르겠고, 내가 배운 Lehninger 3판 생화학 책은 13장인가에서부터 19장 까지 TCA, beta oxidation 등을 각 chapter 별로 따로따로 설명해 놓았다. 난 이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이렇게 단순히 내용만을 쭉- 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나는 동기들보다 1년이 늦었는데 - 휴학했었기 때문에 - 동기 중에 한 명이 얘기하길, "단순히 글만 읽는 것 같아도 책 한 권을 읽는 것과 안 읽는 것은 큰 차이가 나는 것 같다", 라는 얘기. 그 당시에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회의가 들 때마다 친구의 그 얘기가 떠오르곤 했다. 생화학,미생물학,세포생물학,면역학,발생학[각주:3]은 사실 크게 머리 쓸 필요가 없는 과목들이다. 쉽게 말해 암기가 75% 정도. 나머지는 전체적인 시각을 잡고, 완전히 동떨어져 있어 보이는 부분들을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것. 그런데 그렇게 연결짓기 위해서는 75%에 해당하는 부분을 '미리' 알고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암기가 필요하게 되고, 생화학책의 75% 정도가 단순한 암기에 해당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레닌저 책 뒤쪽은 앞에서 나왔던 내용들을 전부 엮는 부분이긴 하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나는 암기에 해당하는 75%의 과정에 있을 때, 그 부분이 왜 필요한지 몰랐고, 그래서 유전학처럼 공부를 안 하려고 했었는데, 옆에서 친구가 중요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해 주었고, 나는 이 말 때문에, 비록 내 마음에는 안 드는 방식이었지만 계속 공부를 했다. 그리고, 전체의 70%를 넘게 공부했을 때에서야 비로소 앞에서 한 내용들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수학과 과목들을 들으면서 논리적으로 잘 짜여진 내용에 의한 기쁨을 맛보면서, 단순히 외우기만 하는 생물학에 점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지만, 한참 뒤에서야 앞 부분에서 단순히 암기했던 내용들이 얽히고 섥히면서 비로소 생물학의 재미를 알 수 있었다. 그렇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옆에서 누군가가 조언을 해 주었고, 나는 그 조언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꾸준히 공부를 했고, 후에서야 그것의 가치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참고글들

* 인내

아침의 신선함이 한낮의 나른함으로 바뀌고,
다리의 근육은 긴장으로 후들거리며,
올라가야 할 길은 끝없어 보이고,
그리고,
갑자기,
아무것도 그대 뜻대로 되지 않으려 할 때,
이 때가 곧 그대가 중지해서는 안 될 때이니라.
- 닥 하마쉴드 (아마 영어순해 2권이었던 듯)

* 지난 37년 동안 나는 하루에 14시간씩 연습을 했다. 그러고 났더니 사람들은 나를 천재라고 부르더라. - 파블로 드 사라사테

  1. "음악이나 별미로는 지나는 사람 잠시 머물게 할 수 있으나, 도에 대한 말은 담박하여 별맛이 없습니다." - 도덕경 35장. [본문으로]
  2. 무위지위 - 도덕경. 하지 않는 함. 하는 것이 없는 것 같아도 꾸준히 일을 하다 보면 결국 무언인가가 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하지 않는 함, 무위지위이다. [본문으로]
  3. 이 과목들도 물론 암기만 하면 별 의미는 없다. 논리적 연관성이 필요하긴 하나 수학이나 화학, 물리보다는 훨씬 적게 필요하다. 이 과목들과는 달리, Weaver의 분자생물학은, 거의 80%가 논리적 내용이다, Genes VII (지금은 Genes X?)이 내용 위주인 반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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