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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

앎의 두 가지 방식

by adnoctum 2010. 6. 3.
2009-06-09 06:07


   머리가 명석하여 듣는 즉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희안한 것은 이런 이들의 경우 '알고' 있는 지식의 깊이가 종종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분명 이해력이 빠르다는 것은 알 수 있는데, 그 이해의 폭이 과연 어느 정도인가? 다시 말해, 갖고 있는 이해의 능력과는 별도로 이해한 것을 다른 것과 연관시키는 능력은, 얼마나 알고 있는가, 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알고 있는 지식이 많지 않다면 이해의 폭이 얕아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이해의 빠르기가 월등히 빠른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사실을 여러 맥락 속에 놓고 다방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주어진 의문이나 사실이 고려되어야 할 수많은 다른 상황들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언급'이 주어지는 것 정도이다.

   아무리 이해력이 높아도 알고 있는 지식이 많지 않다면 그것을 이해하는 폭은 얕아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단 지 '안다'는 것, 그것은 다시 말해, '논리력'이나 '이해력'으로는 결코 얻어낼 수 없는 사실들을 일컫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지적 체계 속에 존재하는 많은 사실들이 모두 논리력에 의해 생성된 것은 아니니까. 경험적 지식은 그래서 중요하고, 아무래도 이러한 것이 흔히 말하는 '내공'이나 연륜이라는 것이 아닐까. 나이가 어렸을 때는 어차피 경험의 한계로 인해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해력'에 의한 지식들이라면,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기능이 조금씩 상실되는 머리 회전 속도를 보충해 주는 것은 축적된 경험, 그리고 그것에서부터 나오는 종합적 사고 능력처럼 보인다. 물론, 그 둘을 겸비한 사람도 많다. 세상엔 천재가 너무 많아...


면학문(다산 정약용이 제자 황 상에게 준 글) (알스터에서 부는 바람 에서 긁어 옴)

내(정약용)가 황 상(黃 裳)에게 문사(文史) 공부할 것을 권했다.
황상은 머뭇머뭇하더니 부끄러운 빛으로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둔한[鈍] 것이요,
둘째는 막힌[滯] 것이며,
셋째는 미숙한[]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배우는 사람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 있는데,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기억력이 뛰어나면 공부를 소홀히 하는 폐단이 있다.
둘째 글짓기가 날래면 글이 가벼워지는 폐단이 있다.
셋째 이해력이 빠르면 거칠게 되는 폐단이 있다.

대저 둔한데도 천착하는 사람은 그 구멍이 넓어지고,
막혔다가 뚫리게 되면 그 흐름이 왕성해지며,
미숙한데도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윤택하게 된다.

천착은 어떻게 하는가? 부지런히 해야 한다.
뚫는 것은 어떻게 하는가? 부지런히 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가? 부지런히 해야 한다.
부지런히 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당시 나는 동천여사(東泉旅舍)에 머물고 있었다.
내(황 상)가 이때 나이가 열 다섯이었다.
어려서 관례도 치르지 않았었다.
마 음에 새기고 뼈에 새겨 감히 잃을까 염려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61년 동안 독서를 폐하고
쟁기를 잡고 있을 때에도 마음에 늘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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